고도성장에 취해 경제체질 개선은 뒷전… 아르헨티나 ‘위험한 회복’
입력 2011-07-26 17:48
미국·유로 국가들이 재정악화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에 노출된 가운데 10년 전 이를 먼저 경험한 아르헨티나의 사례가 타산지석으로 떠올랐다. 2001년 12월 디폴트를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10년가까이 지난 지금 겉으로는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러나 최근 아르헨티나의 성공이 ‘위험한 회복(Risky Recovery)’이라고 깎아내렸다. 2006년 1월 디폴트를 졸업했지만 경제체질 개선을 하지는 않고 우연히 찾아온 현재의 풍요를 누리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고속 성장 계속=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아르헨티나 경제성장률이 6%라고 전망했다. 아르헨티나 정부 추정치는 8.2%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9.1%로 최근 5년 새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아르헨티나의 경제규모는 65%나 성장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40.7%로 152.3%인 그리스의 3분의 1도 안 되며 미국, 브라질 보다 낮다.
해외로 자본 유출이 심해지고 있지만 지난 4년간 1000억 달러를 농산물 수출로 벌어들였다. 최근 농산물 가격 추이라면 아르헨티나의 앞길은 탄탄대로다. 아르헨티나 정부로서는 비관론자들에게 한 방 먹였다며 기뻐할 만한 일이다.
◇세계 경제 덕분에 호황=아르헨티나의 승승장구는 국제적으로 앓고 있는 인플레이션으로 반대급부를 누려왔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곡물 값이 폭등하면서 농산물이 전체 수출량의 35%를 차지하는 아르헨티나가 큰 수혜를 얻은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씽크탱크 시펙(CIPPEC)의 루시오 카스트로는 “무역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아르헨티나 입장에선 최고의 상황”이라며 “하지만 식품·천연자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경제 부문의 생산성이 아주 안 좋다”고 설명했다.
1분기 실업률은 7.4%로 나쁘지 않았지만 투자가 GDP의 19.4%에 불과하다. 카스트로는 “아르헨티나의 생산성은 암울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고질병인 포퓰리즘 정책은 정부의 재정상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에너지와 운송분야에서 두둑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민심을 의식해 난방용 연료에 최우선 순위를 두다보니 겨울만 되면 공장은 연료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다.
아르헨티나는 엄청난 양의 원유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를 개발하기 위한 투자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카타르와 액화천연가스를 20년간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아르헨티나는 2006년 에너지 분야에서 56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올해는 30억 달러의 적자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의 지출은 세수를 앞지르고 있다. 10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포퓰리즘 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재정부족은 교육, 의료 등 투자가 필요한 부분에 재원이 부족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정부는 거짓말쟁이”=정부가 제시하는 각종 수치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르헨티나 경제에 착시효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 위험요소다. 정부는 올해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 전망치가 9.7%라고 밝혔다. 하지만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25∼30% 가량이라고 전망했다. 정부와 민간의 전망이 3배가량 차이가 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정부의 CPI 상승률이 조작됐다”고 주장한 M&S컨설토르 소속 경제학자들을 상대로 허위 주장을 통해 부당 이득을 취한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에게는 일인당 12만1000달러(약 1억30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됐다. IMF는 각종 경제지표를 국제기준에 맞추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아르헨티나의 GDP대비 채무비율이 40.7%라고 하지만 클라우디오 루저 전 IMF 이사는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160억 달러의 채무가 있으며 외국 정부에도 70억 달러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를 갚을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인구의 50%가 빈곤 상태이거나 빈곤에 처할 위기인데도 정부는 이런 인구의 비율이 10%에 불과하다고 발표하고 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자신을 강하게 비판한 아르헨티나 최대 일간지 클라린(Clarin)을 겨냥해 신문 및 잡지의 판매장소를 가판대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세계 경제 외톨이=루저 전 IMF 이사는 “아르헨티나가 점점 세계경제와 무관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지금도 남미지역에서 1인당 구매력이 최고 수준이지만 주변국에 비하면 퇴보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규모는 브라질의 6분의 1, 멕시코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조만간 콜롬비아에도 추월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경기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거론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관리하고 환율을 안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펙의 카스트로는 “20년 후에 역사는 아르헨티나가 지금의 풍요로 공기업, 사회간접자본, 교육, 건강, 홍수 대비 등에 투자했느냐고 물을 것이다”라며 “지금처럼 해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