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20) 네팔에 뿌린 작은 씨, 목회로 피다
입력 2011-07-26 17:54
의료선교 활동 중 인연이 되어 한국에서 치료를 받게 된 경우도 있었다. 2005년 만난 네팔 치투완의 가겐드라 교장과 비멀라 사모, 2006년 라오스에서 만난 조이가 그렇다.
당시 30대 후반의 가겐드라 교장은 한국의 외국인 근로자 출신으로 우리말 구사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한인선교사가 세운 고아원에서 정성을 다해 일했다. 2005년 9월 의료선교 차 네팔을 방문했을 때 그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저, 선생님. 제 아내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데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허리 디스크가 있군요. 수술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만.” “아, 그렇군요.”
한국 선교사를 도와 헌신적으로 사역하는 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던 나와 아내는 그 부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장 선생님, 한국에 와서 수술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병실은 저희 병원을 이용하면 되고 제가 잘 아는 분을 통해 수술을 받게 배려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약을 주시고 증상을 봐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요. 그렇게 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도우라는 마음을 주시네요.”
“그…그래도 되겠습니까.”
2005년 11월 우리 부부는 그분들이 한국에서 치료받는 경비 일체를 지원했다. 지인을 통해 피부 절개를 않고 척추 수술을 받았는데 결과가 아주 성공적이었다. 늘 통증을 호소하던 비멀라가 말끔히 낫자 부부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은 선행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선교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07년 네팔에서 국제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원장 선생님 가겐드라입니다.”
“아, 교장 선생님 어떤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사모님의 허리는 괜찮고요?”
“네, 아주 좋습니다. 아내를 고쳐주신 그 은혜를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이 저희 부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참, 내년에 제가 한국을 가려고 합니다.”
“오, 그러세요? 무슨 일 때문이죠?”
“신학교에 진학하려 합니다.” “예?”
그렇게 네팔로 돌아갔던 가겐드라 선생 부부가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2008년이다. 협성대 목회학 석사과정에 입학한 그는 3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현재 네팔 나랑가드라는 곳에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여보, 정말 하나님께선 작은 배려를 통해 엄청난 일을 하시는 것 같아요.”
“정말 맞는 말이야. 씨를 뿌리는 것은 우리의 일이지만 백배 천배 키워주시는 건 정말 주님이시네.”
우리는 2007년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펼쳤다. 비엔티안엔 2004년 5월 무료진료소인 라오스 선한목자병원을 개원했다. 선천성 심장병에 희귀병을 앓고 있던 스무 살의 조이를 만난 건 그때다.
“어디가 아파서 왔죠.”
“심장병이 있어요. 날 때부터 그랬다고 해요.”
처음 그를 봤을 땐 10살 정도 되는 소년인 줄 알았다. 친구들은 대학교에 다니거나 외지로 나갔지만 10m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그는 소를 끌고 다니며 풀이나 먹이는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지역 주민 800여명을 진료하고 한국으로 향하는데 조이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여보, 심장병을 앓고 있던 앙상한 조이가 자꾸 마음에 밟혀.”
“나도 그래요. 우리가 그 청년을 찾아 도와주는 건 어떨까요.”
한국에 돌아온 우리 부부는 현지 한인회에 부탁을 해 조이의 출국 절차를 밟았다. 여권은 물론 출생기록조차 없던 그를 데리고 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개월 후 나는 조이를 데리러 라오스를 향했다. 집에서 조이와 그를 돌봐줄 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온 가족이 울음바다가 됐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