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19) 3개월새 파키스탄·네팔서도 의료선교

입력 2011-07-25 19:40


2005년 1월 인도네시아 이슬람 회당 처마 아래 차려진 간이진료소에서 3일간 600명 이상의 쓰나미 피해 환자를 돌봤다. 상처가 곪은 환자가 대부분이었는데 나와 아버지, 동생은 환자들의 고름을 짜내고 살갗을 꿰매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이한 사실은 환자 10명 중 9명이 하나같이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한 것이다.

“가슴이 아픕니다.” “어디 봅시다. 이상은 없는데요. 어디에 부딪히기라도 했나요?” “아뇨. 쓰나미 이후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네요.” 두려움 때문에 온 공황장애였다. 눈앞에서 자기 가족이 파도에 휩쓸려가고 썩은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상황 속에서 나타난 피해의식이었다. 반군의 탱크가 길거리를 오가는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은 더욱 공허했을 것이다. 어른들은 대부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아, 하나님이 안 계신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시체 썩는 냄새는 진동하고 주변에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의 처지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인 현지 교회 목회자는 주민들의 어려움 앞에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슬람 과격분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부나 현지 목회자나 비슷했던 것이다. “저들이 무슬림인데 굳이 우리가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를 괴롭히던 사람들입니다.” 마치 복음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코앞에 있지만 구원을 얻었다고 뒷짐만 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반성했다. 처음엔 비협조적으로 통역만 해주다가 우리의 사역을 보고 감동을 받았는지 현지 사역자는 적극적으로 도왔다.

마지막 날 우리는 교회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약품을 일일이 분류해 일반인도 손쉽게 쓸 수 있도록 메모를 남겨놓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소중한 약품들은 한낱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5일간의 의료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광림교회에서 전해준 5만 달러의 구호금은 현지 감독에게 전달했다.

그해 7월에는 파키스탄 의료선교를 다녀오고 9월 15일부터 19일까지 네팔 치투완에서 진료활동을 펼쳤다. 이곳은 감리교 소속 이해덕 선교사님이 선교활동을 펼치는 곳으로 수도 카트만두에서 자동차로 6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이 선교사님은 400명의 고아들을 모아 ‘소망의집’이라는 보육원을 운영하고 계셨다. 그곳에서 한 일은 염증을 치료하고 종양을 떼어내는 일이었다. 수백명의 환자를 돌보면서 뼈저리게 느낀 점은 ‘항생제 하나만 제대로 처방받아도 이렇게 심각한 결과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그곳에도 무료진료소를 세우고자 기념식수를 했다.

이처럼 선교지역을 돌보고 돌아올 땐 뿌듯했지만 한편으론 왠지 모를 허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국의 병원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강남 한복판에서 ‘별들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판에 직원 10명이 선교를 한다고 일주일간 빠져나갔다면 그 병원은 조만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한목자병원은 달랐다. 무모한 짓 같아 보였지만 매번 선교를 다녀올 때마다 하나님은 그때 그 상황에 맞게 더 좋은 것으로 주셨다. 병원의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고 무릎수술 환자도 끊이지 않았다.

‘아, 선교는 우리의 결단이고 모험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기에 당장에 무모하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시는 구나. 그렇다. 의료선교를 다니면서 우리가 베풀러 다닌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해외 의료선교 활동을 펼치던 중 몇몇 사람은 한국으로 초청해 치료해 주기도 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