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세원] 어머니의 밥상
입력 2011-07-24 17:42
무더위와 장마 통에 기운도 덜한 것 같고 입맛도 떨어졌다. 찬거리를 구하러 마트에 갔지만 마땅하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고르게 알이 꽉 찬 찰옥수수를 보니 걸음이 멈추어졌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찰옥수수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몇 개를 봉지에 담았다. 몇 걸음 옮기니 빨간 밤고구마가 눈길을 끌었다. 매끈하게 잘 생긴 것을 골라 담고는 야채 코너에서 상추와 호박잎 등을 장바구니에 담아 왔다.
집에 와서 물건을 풀다 어머니가 생각났다. 오늘 장바구니에 담아 온 것들은 모두 어머니가 즐겨 드시던 것이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일까. 어머니와 나는 좋아하는 음식이 달랐는데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것을 즐겨 먹고 있었다.
찰옥수수와 밤고구마를 찜통에 쪄 먹어보니 그 맛이 별미다. 빨간 껍질의 토실한 밤고구마가 달큰하니 입 안에서 녹는다. 쫄깃하게 씹히는 찰옥수수의 맛은 또 얼마나 좋은지 쉴 새 없이 옥수수 알을 까 입에 털어 넣었다.
달아난 입맛을 찾아줄 상추쌈과 호박잎쌈의 밥상을 기대하며 흐르는 물에 쑥갓과 상추를 잘 씻어내고 줄기를 벗겨낸 연한 호박잎을 쪄냈다. 고추장과 된장으로 쌈장을 만들고 된장에 풋고추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다져 넣고 국물이 자작할 때까지 졸인 강된장을 준비하니 어느 때보다 식탁이 풍성해졌다. 쑥갓을 곁들인 상추에 밥을 올리고 쌈장을 얹어 볼이 터질 듯 한입 가득 무니 금세 입맛이 살아나는 것 같다. 호박잎쌈에도 밥과 강된장을 올려 크게 한 쌈 입에 무니 어머니 생각에 목이 멘다.
여름이면 어머니는 상추쌈과 호박잎쌈을 잘 드셨다. 강원도 찰옥수수처럼 고르고 야문 이로 맛나게 찰옥수수를 즐겨 드시고 밤고
구마를 좋아하셨던 어머니. 어김없이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아침식사 준비를 해놓고는 약수터에 올라가 운동을 하시고 약수까지 한짐 등에 메고 오신 뒤 아침식사를 하시던 어머니.
언제나 밥이 꿀맛 같다며 흔한 감기 몸살로 앓아누운 적 없이 평생을 건강히 사시니 장수하실 줄 알았는데 그만 위암으로 칠순을 갓 넘기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인스턴트 음식은 입에 댄 적 없이 자연에서 나는 음식만 좋아하신, 건강하고 고운 어머니 육신에 암세포가 진을 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손맛이 좋으신 어머니의 밥상을 당연하게 받아먹었는데 어머니가 떠나신 후 함께했던 그 식탁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느낀다. 소소하게 여겨지는 어머니의 밥상이야말로 일상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며 행복의 원천이다. 오늘도 식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쌈을 싸 먹으며 두런두런 아무 얘기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소박한 소망조차 이제는 영 이룰 수 없음이 아프다.
지금 그리운 것은 집안과 앞뒤 뜰을 종일 분주히 오가셨던 어머니의 바쁜 발걸음과 알뜰하고 깊은 사랑이다. 그리움으로만 살아계신 어머니. 그러나 마음에 새겨진 어머니와의 온갖 추억을 되새기며 그리움으로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김세원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