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 리듬으로 만나… 그의 詩, 우주를 드나든다
입력 2011-07-22 17:57
시인 정진규 신작 시집 ‘사물들의 큰언니’
산문시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 정진규(72) 시인의 신작 시집 ‘사물들의 큰언니’(책만드는집)는 그가 3년 전 서울을 떠나 거처를 생가인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보체리로 옮긴 뒤 쓴 시편들을 선보인다. 그가 사는 집의 택호는 ‘저녁이 아름다운 난간’이라는 뜻의 석가헌(夕佳軒). 그 석가헌의 난간을 잡은 채 그는 모든 사물과 대상을 리듬으로 만난다.
“소리들의 속살이 보인다 날아가는 화살들만이 아니라 되돌아 다시 오는 화살 떼들이 보인다 한 몸으로 보인다 너와 나의 운동엔 순서가 따로 없다 사랑의 운행엔 시간이 따로 없어서 거기 다 있다 (중략) 마악 피어난 작은 조선 채송화 한 송이가 찰나라고 일러야 하느냐 언제 제 혼자 피어 저리 세상에 빼곡빼곡 쟁여 있느냐”(‘조선 채송화 한 송이’ 일부)
시집은 우주의 생체 리듬이라 할 ‘율려(律呂)’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율려는 좁게는 음성이나 음악의 가락을 뜻하지만 여기엔 동양의 심오한 자연관과 우주관이 담겨 있다. 율려는 12음, 즉 육율(六律)과 육려(六呂)를 지칭하는데 이는 각각 1년 중 양(陽)에 해당하는 따뜻한 여섯 달과 음(陰)에 해당하는 차가운 여섯 달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론이야 어쨌든 그는 우주 음양을 드나드는 시를 낳고 싶은 것이다. 그런 시를 쓰고 나면 온몸이 개운하고 시장기가 돈다고 말한 것도 시인 자신이다.
“물 듣는 빨간 고무장갑을 빼면서 겨울 뜨락에서 나를 맞는 제수씨, 혼자된 제수씨처럼 마르게 웃는 슬픔을 나는 안다 (중략) 칼국수를 미는 제수씨의 홍두깨가 어느새 구겨진 슬픔을 밀고 있다 里長 볼 때, 아우가 타고 다녔던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아직도 헛간에 기대어 서 있다 구르지 않는 슬픔을 나는 안다”(‘마르게 웃는’ 일부)
혼자 된 제수씨를 바라보면서 슬픔에도 마르게 웃는 슬픔, 구겨진 슬픔, 구르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그는 자서(自序)에서 자신이 추구해 온 산문시의 리듬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律’의 어느 부분에 ‘呂’를 얹고 ‘呂’의 어느 깊이에 ‘律’을 놓느냐, 어느 무게를 골라 얹느냐, 그리하여 서로의 어느 길섶에서 몸 섞이게 하느냐, 그 순간을 듣고 보느냐, 실체를 생산하느냐, 하는 것이 시의 관건이다. 순서대로 싹 틔우고 꽃대궁 세우고 노랑꽃 한 송이 피우다가 허공에 날리는 민들레의 비백(飛白), 모두가 ‘律’과 ‘呂’의 여합부절(如合符節)이다.”
부절(符節)이란 대나무 쪽에 글자를 새겨 이것을 반으로 쪼개어 한쪽씩 나누어 가진 뒤 훗날 맞추어 보는 신표를 말하는데 결국 한치 오차도 없이 사물이 꼭 들어맞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시는 이런 이론에 앞서 정서의 전달을 우선한다. 정진규의 시 역시 이런 도식적 시론에서 벗어나 늘 존재의 슬픔으로 번져가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슬픔이 둘과 셋의 슬픔으로 번져가는 길목에 독자의 시선은 위치한다.
“마악 지고 난 붉은 배롱나무 꽃자리를 통과하고 있는 쓸쓸한 저녁노을 묻히고 서 있는 여자의 바알간 목덜미,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그에게로 오늘도 내가 숨어든다 돌아오고 있다 오늘도 낡은 가방을 들고 삼십 년대처럼 내가 아주 작은 키로 버스에서 내리고 있다 중절모를 쓰고 있다 논두렁길로 한참 더 걸어 들어가야 한다”(‘보체리’ 전문)
이 시는 오래전 떠나온 고향으로 회귀했을 때의 심경을 그린 작품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실, ‘그에게로 오늘도 내가 숨어든다 돌아오고 있다’라는 구절에서 보이는 ‘숨어든다’와 ‘돌아오고 있다’는 상호모순적 표현이다. ‘들다’와 ‘오다’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상호모순이라기보다 화자의 현존과 과거 시간의 쌍방향적 움직임의 포착이라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키로 버스에서 내리는 소년 정진규와 중절모를 쓴 현재의 ‘나’가 동시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도 이런 상상력에 기댄 것이다. 그는 시간의 순차성에 따른 시간 배열을 동시성으로 바꿈으로써 시간의 격절을 무화시키고 봉합 자국이 없는 시간 연속체를 형상화하고 있다. 매듭이나 봉합이 없는 시간의 지속감, 그것이 율려적 시간 의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