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진홍] “나만 아니면 돼!”

입력 2011-07-21 19:26


초등학생들이 즐겨 쓰는 두 가지 말이 있단다. ‘스멜’과 ‘나만 아니면 돼!’. 올해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된 후배가 한 학기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직접 겪은 이야기다. 둘 다 개그맨들이 만들어낸 유행어다.

‘스멜’은 박명수씨가 TV 오락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동료 연예인에게 냄새가 난다며 면박 주는데 사용하다 “병원은 나름대로 스멜이 있어요, 하스피탈 스멜” 등 여러 프로에서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초등학생들 역시 이 단어를 이상한 냄새가 날 때는 물론 아무데나 갖다 붙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상대가 맘에 들지 않으면 “저질 스멜”, 뭔가 기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대박 스멜” 등등….

유행어에 오염되는 童心

‘나만 아니면 돼!’는 TV 오락프로그램 ‘1박2일’에서 시작됐다. 야외에서 잠자게 하거나 밥을 굶게 하는 ‘복불복’ 게임에서 자신만 불이익 받지 않으면 괜찮다는 의미로, 강호동씨는 간신히 벌을 면하게 되면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고함치듯 이 말을 사용했다. 초등학생들도 내기할 때나 누군가 잡일을 해야 할 학생을 골라야 할 때 이 말을 쓴다고 그 후배는 전했다.

어린이들이 대중매체에 가장 많이 영향 받는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흔히 말(言)이 사고를 좌우한다고 한다. 가뜩이나 독서량이 적은 어린이들이 국적불명의 말을 따라 하면서 머리까지 오염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여서 더욱 그렇다.

생각해 보면 연예인들의 거친 발언들은 훨씬 더 많다. “스팀 받는다” “플레이하던 치킨” 등 알쏭달쏭한 외국어, “야! 야! 너!” 등의 반말, 그리고 비속어와 은어 등등….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 그리고 시청률에 민감한 방송사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수위가 지나치다. TV를 시청하고 있는 어린이들에 대한 배려나 책임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바로 개그맨 자신이나 친구의 자식들이 그대로 흉내 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며 엉터리 언어의 사용을 자제했으면 좋겠다. 방송심의 규정에도 “바른 언어생활을 해치는 억양, 어조, 비속어, 은어, 조어, 반말 등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적혀 있지 않은가.

‘나만 아니면 돼!’에는 또 다른 문제가 내재돼 있다. 바야흐로 무한 경쟁사회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교묘하게 쳐 밀어내면서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이른바 ‘팔꿈치 사회’다. 누가, 어떤 의도로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여하튼 대부분의 경우 어릴 때부터 경쟁을 강요받는다. 다른 애들보다 공부 잘해야 돈도 많이 벌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다. 내가 잘되기 위해선 경우에 따라 반칙도 용인될 수 있다고 배운다.

이 논리에 따라 성공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극소수다.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도 이미 아니다. 그럼에도 누구나 경쟁에서 이기면 잘될 듯이 미화하기 일쑤다.

연예인들 거친 발언 삼가야

공동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얼마 전 부산의 한 병원 주차장에서 벌어진 일이 좋은 사례가 될 듯하다. 간질을 앓고 있는 20대 남성이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지만, 주위 사람들은 이 남성을 피해 가던 길을 재촉할 뿐 즉각 도움을 주지 않았다. 방관자일 뿐이었다. 이 광경은 동영상으로 퍼져 인터넷을 달궜다. ‘나만 아니면 돼’가 만연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해 씁쓸하다.

‘나’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것이 공동체적 인간관계의 핵심이다. ‘나만 아니면 돼’ 대신 이타적인 생활습관의 확산을 위해 방송사들이 더 노력해주기를 기대한다. ‘스멜’ 등 요상한 말은 그만하자. 찜통더위에 더 짜증난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