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시] 하얀 접시에 올라온 하얀 가자미 한 마리
입력 2011-07-21 19:03
김승희(1952∼ )
나는
‘나는’이라든가 ‘내가’라든가 하는
말을 잊어야만 한다고
또한 ‘나의’라든가 ‘내’라든가 하는 말도 다 버려야
만 한다고
바다처럼 푸른 식탁보가 깔린
작은 나무식탁 앞에서
하얀 접시에 올라온 하얀 가자미 토막들을 보면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다
이 은은하고 도도한 광채 어린, 이 접시는 속삭인다
흰 살 가자미의 토막, 껍질, 지느러미, 빼낸 창자,
형제자매, 부모, 고향… 그런 것을 다 복원해낼 수
있는가,
유언도 없이 잡혀 와 토막 난 가자미 한 마리,
내가 주어가 될 수 없다는 것
나의 소유격도 결국은 다 파도 거품처럼 무의미하
다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는 접시가 주어란 말인가?
(이하 생략)
가자미 한 마리가 하얀 접시에 토막 난 채 놓여 있다. 하얀 공포, 하얀 죽음이다. 토막 난 생선, 토막 난 생명 앞에서 마음을 다잡을 수 없다. ‘나’라는 주격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토막 나 있다. 가자미가 놓여 있는 접시 하나가 지금은 세계 전체와 맞먹는다. 그 접시도 살짝 이가 빠져 있다.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