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경남 거창순복음교회 이바울 목사] 하우스 전도법으로 ‘거창한 방주 교회’를 세우다
입력 2011-07-21 20:37
인구 3만명 정도의 소읍 강가에 ‘거창한 교회’가 있다. 경남 거창읍 황강 옆 거대한 방주처럼 생긴 거창순복음교회(이바울 목사·54)다. 멀리서 보면 초대형 유람선 같다. 이 교회는 창립 21년 만에 출석성도만 1000여명이다. 보수적인 신앙이 강한 지역이라 아무도 이렇게 큰 교회로 발전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장로교나 감리교도 아닌 교단이 말이다. 물론, 지역 정서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기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여전히 이 교회 근처에도 오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멀리 외지 사람들이 온다는 것일까? 교인 대부분은 30대 이상 50대 이하다. 주변 환경도 달라졌다. 비닐하우스가 즐비했던 교회 주변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강 건너편엔 거창종합운동장이 들어섰다.
◇비닐하우스 노인에게 배운 지혜=33세였다. 이 목사가 거창에 첫 발을 디딘 때는 1990년 7월. 공동묘지 부근, 보증금 1000만원에 월 40만원짜리 건물을 임대해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건물만 임대하고 인테리어만 잘 해놓으면 성도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었다. 개척 6개월 동안 성도라고는 아내 한 명뿐이었다. 다달이 밀리는 월세는 야금야금 보증금을 깎아먹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돈도 없었다.
이 목사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대부흥회를 열 계획을 세웠다. 소문난 부흥사 10명의 리스트를 뽑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흔쾌히 응해주지 않았다. 어렵사리 한 분을 섭외했다. 희망에 부풀어 부흥회가 열리기만 기다렸다. 낭패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시끄러운 부흥회’를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것이었다.
“돼지저금통도 털었는데….”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내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도 따라 울었다.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0일을 기도하겠다는 각오로 매일 오후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절규하며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기도를 마치고 뚝방을 걷다가 한 노인을 만나 무심코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 왜 고추를 밭에 그냥 심지 않고 비닐하우스에 심습니까?” 그 노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이 목사를 쳐다봤다. “뭐라카노 이양반이, 서울사람이 뭘 알겠노? 모종을 옮겨야지 씨만 뿌리먼 말라죽는다카이, 쪼매해서 못묵는다 아이가.”
이 목사는 무릎을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 원리를 목회에 적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 성도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렵게 교회에 데려오면 한두 주일만 지나면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농부가 비닐하우스에서 먼저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묘목을 키우듯이 새신자를 교회에 데려오기 전에 먼저 집안에 모이게 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어느 정도 자란 묘목이 밭으로 옮겨지면 잘 자라듯이 비닐하우스에서 복음의 씨를 받은 새 신자는 스스로 교회에 등록하게 되는 거지요.”
하우스 전도는 반상회와 다름없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스스럼없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10여명 정도 모였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철칙으로 지키고 있는 세 가지다. ‘교회 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예배가 따로 없다’ ‘성경공부 시간이 없다’.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을 안 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 마음의 밭에 먼저 복음의 씨를 뿌리는 원리와 같다. 때가 되면 모이는 장소를 교회로 옮기기만 하면 됐다.
◇방황하다가 다시 십자가 곁으로=이 목사는 교회에 몇 번 왔다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 두 가지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 접하는 교회 분위기가 무섭다’는 것과 ‘너무나 지루하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자가 절에 가서 불상 앞에 앉아 있는 심정과 같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신자들을 일단 전도해서 바로 교회로 데려오면 십중팔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안티기독교인으로 변한다고 했다. 찬양이나 통성기도 등 교인들에겐 익숙하지만 처음으로 예배당을 찾은 이에게는 지루하고 거북한 느낌을 줘 다시는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목사는 설령 이들이 계속 나온다 하더라도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나지 못한다고 했다. 세월이 지나고 직분을 받지만 여전히 불신자, 무자격 교인과 다름없이 된다는 것이다. 즉, 복음도 예수님도 제대로 모른 채 교회의 문턱만 넘나드는 껍데기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목사는 원래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강변가요제에 출전했지만 입상하지 못했다. 노래를 포기할 수 없어서 2∼3년 동안 밤무대에도 섰다. 그의 운명을 돌려놓은 곳이 교회였다. 80년 민주화운동시절 시위대에서 쫓겨 들어간 곳이 서울 수유리에 있는 한 교회였다. 그곳에서 그는 삶의 방향을 새로 잡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때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에 다니다가 자퇴하고 방황하다가 다시 십자가 곁으로 돌아왔다. 86년 서울 대조동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뒤늦게 철이 들었다. 90년 안수를 받자마자 내려온 것이 거창이었다. 2007년엔 청년시절 못 냈던 음반도 냈다. 제목은 ‘다 이루었다’ 요즘은 부흥의 현장을 찾는 이들로 교회는 늘 북적거린다. 이 목사는 3개월째 주일 오후 11시 CBS TV에서 ‘부흥한국’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거창순복음교회는 2005년엔 출석 성도 300명이 넘었다.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 교회를 이전했다. 4년 전 지금의 황강 옆 1500여명이 한꺼번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다. 농촌 지역의 교회치곤 평균 나이가 젊다. 30대에서 50대다. 교회는 거창의 랜드 마크가 됐다. 주말이면 교회는 젊음의 광장으로 변한다.
이 목사의 가슴은 아직 텅 비었다. 1만여명이 출석하는 거대한 방주를 만들겠다는 야망 때문이다. 멀리 합천 가야산 상왕봉이 보이는 목양실에서 이 목사는 매일 4∼5시간 새벽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다.
거창=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