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놈’을 기다린다… 365일 깨어있는 섬 속의 섬 ‘제주 태풍센터’ 24시
입력 2011-07-21 18:18
바다에서 태어난 이 ‘괴물’이 육지에 상륙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떤다. 2002년엔 246명의 인명(이하 실종 포함)을 희생시켰다. 2003년엔 13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괴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뿌리째 뽑힌 나무가 나뒹굴고 부서진 집이 널부러졌다. 엄청난 비를 뿌리고 강한 바람을 부르는 이 괴물은 태풍(颱風)이다.
태풍은 북태평양 서부에서 발생하는 열대저기압 중에서 중심부근의 최대 풍속이 초속 17m이상으로, 강한 폭풍우를 동반하는 것을 말한다. 지역에 따라 허리케인이나 사이클론 등으로 불리는데 세계적으로는 해마다 대략 80개 정도가 발생한다.
1904년 기상관측이 시작된 뒤 지난해까지 한반도에는 모두 327개의 태풍이 영향을 미쳤다. 평균 3개꼴로 시기는 8, 7, 9월 순이다. 가끔 5, 6월이나 10월에도 태풍이 왔다. 올해는 이미 제5호 태풍 메아리가 지난달 서해안을 따라 움직이다가 북한 신의주에 상륙했다.
태풍의 경제적 피해는 실로 천문학적이다. 태풍 ‘루사’가 한반도에 상륙했던 2002년에는 무려 5조1419억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매미’가 찾아온 2003년에는 단 이틀 동안 4조2225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교한 예측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2008년 4월 국가태풍센터를 세웠다. 조금이라도 일찍 태풍을 만나기 위해 한라산 기슭인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세웠다. 제6호 태풍 ‘망온’이 한반도 방면으로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은 지난 18일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국가태풍센터로 날아갔다.
‘독한 놈’이 왔다…진로를 예측하라
망온은 지난 12일 오후 3시 괌 동북동쪽 1280㎞ 해상에서 발생했다. 광둥어로 ‘말 안장’이란 뜻의 이 중형태풍은 15일 오후 3시 괌 북북서쪽 880㎞ 지점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반도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가태풍센터는 비상근무태세로 돌입했다.
“독한 놈이 오는 게 틀림없는데….”
김태룡 국가태풍센터장은 강력한 태풍을 항상 ‘독한 놈’이라고 부른다. 기상청이 보유한 슈퍼컴퓨터 3호와 충북 진천에 있는 국가위성센터의 천리안 위성사진, 또 그동안 축적된 과거 태풍 자료 등을 바탕으로 볼 때 망온은 독한 놈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북위 19도 부근에서 발생한 망온은 섭씨 27도의 더운 바닷물에서 에너지를 얻었다. 태풍 반경은 450㎞의 중형급이지만 중심기압 935헥토파스칼(hPa), 초속 48m의 강풍을 동반한 채 한반도에 상륙한다면 막대한 피해가 날 수밖에 없다. 태풍센터는 전시상황을 맞았다.
18일 오후 9시25분 태풍센터 2층 상황실. 가로 5.5m, 세로 2m의 대형 모니터에 각종 위성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천리안 위성으로부터 수신한 사진 외에도 일본과 중국, 미국 등에서 받은 각종 기상정보 등이 참고자료로 올려져 있었다. 해수면 온도와 기압배치도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긴급 화상회의가 소집됐다. 기상청(서울) 유희동 예보정책과장과 국가위성센터(충북 진천) 박종서 위성분석팀장이 연결됐다. 태풍센터에서는 박상욱 기상연구관이 참여했다.
박 연구관 : “망온의 현재 중심기압은 945헥토파스칼, 이동속도는 시속25㎞. 앞 시간보다 시속 1㎞정도 빨라졌습니다. 진로는 일본 규슈지역을 살짝 스친 뒤 누운 S자 모양으로 진행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유 과장 : “과거 유형 등을 볼 때 남동진하기보다 전반적으로 동진할 것으로 보입니다. 캄차카 반도에 있는 저기압 때문에 북동진하기보다 동쪽으로 가는 …. 그 점을 감안해 주세요. 일본 내륙으로 간다면 태풍의 예상반경을 작고 빠르게 그려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조금 더 크고 느리게 예상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박 연구관 : 제 생각에는 24시간 뒤 시코쿠 남쪽에 상륙하지 않고 그 부근에 있다가 48시간 뒤에는 북동쪽으로 이동할 것으로 보입니다. 72시간 뒤는 약간 남쪽, 96시간은 다시 북쪽으로 갈 것 같습니다.”
10여분간의 의견교환 끝에 오후 10시 태풍 예상진로를 담은 자료가 발표됐다. 기상청의 의견이 많이 반영됐다.
다음 날 오전 9시25분 다시 3각 화상회의가 열렸다. 이번에는 기상청의 이미선 총괄예보관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의견을 냈다.
이 예보관 : “거제 지역의 바람이 초속 13m인데 (초속 15m이상이어야 발령하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인근 지역에 태풍주의보 발령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 센터장 : “일본 자료 등을 볼 때 (거제도와 가까운) 대마도는 바람이 약한 것으로 나옵니다. 우리 동해남부나 남해동부는 태풍주의보보다 풍랑주의보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번엔 태풍센터의 의견이 채택됐다. 오전 10시 우리나라 동해남부 및 남해동부에 태풍주의보 대신 풍랑주의보가 유지됐다.
실제 망온은 한반도로 다가오다 일본으로 방향을 틀어 규슈지역을 할퀴고 21일 태평양쪽으로 빠져나갔다. 일본을 강타한 망온은 고치현 우마지무라(馬路村)에서만 19일 하루 851.5㎜의 물폭탄을 퍼부었다. 1968년 미에(三重)현 오와세시에서 측정된 일본 내 하루 강우량 기록(806.6㎜)을 43년 만에 갈아치웠다. 2002년 태풍 루사로 강릉에 내린 하루 최대 강우량 870.5㎜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반면 우리나라 동해안은 일부 지역에서 많은 비와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영서 및 수도권은 30도가 넘는 불볕더위를 기록했다.
섬 속의 섬. 태풍을 즐긴다
한라산 중턱 해발 270m 중산간 지점에 위치한 태풍센터는 우리나라는 물론 북서태평양 지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태풍을 관측하고 진행방향을 예측하기 위한 전초기지다. 앞으로는 태평양이 보일 정도로 탁 트였고 뒤로는 한라산이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다.
태풍재연 실험동 등 각종 연구시설이 들어설 것에 대비해 6만5000㎡(1만9778평)의 커다란 부지를 확보했으나 지금은 2층짜리 청사(1692㎡·512평)가 이 일대 유일한 인공건조물이다.
태풍의 눈과 날개를 본떠 설계한 이곳으로 바로 가는 대중교통 수단은 없다.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가려면 20분 이상을 걸어야 한다. 그나마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씩 다닌다. 지난겨울 한라산에 눈이 많이 왔을 때에는 출근길이 전쟁이었다. 승용차를 두고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을 헤쳐 수 킬로미터를 걸어서 출근했다.
태풍센터가 24시간 운영되지만 구내식당은 점심에만 이용할 수 있다. 외진 곳이라 아침식사부터 저녁식사까지 준비하며 일할 사람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야근을 위해서는 도시락을 싸오거나 식당에 남은 밥과 반찬을 재활용해야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김 센터장을 포함한 20명의 직원은 이런 생활에 익숙하다. 다소 불편하지만 이들은 여기서 근무하는 게 행복하다. 자신들이 연구하고 예측하는 태풍 정보가 국민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믿어서다. 소박한 즐거움도 있다. 고사리가 나는 봄에는 점심 식사 후 센터 주변을 산책하며 야생고사리를 채취하기도 한다.
태풍센터에서 유일한 박사학위 소지자인 최기선 기상연구사는 부인 차유미 연구사와 함께 근무하고 있어서 더욱 행복하다고 말했다.
최 연구사는 “우리의 태풍연구 수준이 결코 미국이나 일본 등에 떨어지지 않는다”며 “태풍은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몸이 다소 피곤하긴 하지만 태풍자료를 분석해 예측정보를 만들어내는 일은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태풍 예측엔 돈이 든다
태풍 진로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태풍의 눈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단위로 태풍의 눈을 연결하면 그게 바로 이동경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을 찾아내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위성사진이나 기상레이더 분석 자료 등을 보면 깨끗하게 태풍의 눈이 잘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때문에 각국의 기상정보를 서로 공유해 예측의 정확도를 높인다.
태풍센터는 하루 두 차례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와 일본의 지역특별기상센터(RSMC), 미 하와이의 합동태풍경보센터(JTWC) 등으로부터 기상정보를 제공받는다. 태풍센터는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올 4월부터 태풍예보기간을 3일에서 5일로 확대했다.
각국의 기관은 서로 상대 지역의 기상을 예측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각자 자국의 예상피해를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태풍의 예상진로를 놓고 중국은 본토 상륙 가능성을 강조하는데 반해 일본은 열도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우려하는 식이다.
태풍센터에는 올해가 도전의 해다. 태풍 이동경로인 동중국해 수온이 예년에 비해 높아 반경이 최대 800㎞에 달하는 초대형 슈퍼태풍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예측을 위한 연구와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이유다.
“진로를 보다 정확히 예측하면 많은 대비를 할 수 있습니다. 2002년 루사가 찾아왔을 때 입은 재산피해가 5조원이 넘었습니다. 정확하고 신속한 예보로 피해규모를 1%만 줄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500억원의 재산을 지킬 수 있습니다.”
500억원의 1%(5억원)만 투자해도 태풍센터의 연간 연구예산(7억5000만원)은 66% 이상 증액될 수 있다.
서귀포=글·이제훈 기자, 사진=구성찬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