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고 슬프고 가슴 뭉클했던… ‘10대의 추억일기’
입력 2011-07-21 22:24
그림 에세이 ‘오래된 사진’ 출간 신예 만화가 와루 인터뷰
우비 입은 키 작은 소년이 소녀의 우산 아래 서 있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쥐듯 소년의 한 손은 소녀의 긴 다리를 꼭 붙들고 있다. 거대하고 쓸쓸한 세상과 작은 소년, 그가 기댄 긴 머리 소녀. 와루의 만화 에세이 ‘스마일 브러시 오래된 사진’(걸리버)은 너무 큰 세계와 그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작고 연약한 소년의 이야기다. 만화가 와루 자신이다.
19일 직접 본 와루(본명 최완우)는 키가 180㎝에 가까운 건장한 청년이다. 현실과 만화에서 세상과 와루의 비례는 극적으로 역전된 셈이다.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작은 게 아니잖아요. 왜 캐릭터를 그렇게 작게 그리느냐고들 물어요. 의도했던 건 아닌데. 저도 처음에는 ‘내가 왜 나를 이렇게 작게 그렸지?’ 반문했다니까요. 왜 그랬을까요?”
그는 왜 ‘작은 와루’를 그릴까
와루는 지난해 3월 네이버에 웹툰을 연재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예 만화가다. 첫 만화 에세이 ‘스마일 브러시’와 영화
‘헬로 고스트’의 동화버전에 그림을 그렸지만 ‘오래된 사진’은 제법 팬이 생긴 뒤 나온 첫 단행본이라는 의미가 크다. ‘오래된 사진’은 성인 와루가 자신이 10대 시절을 보냈던 1990년대 초반을 어슬렁대며 남긴 추억일기 같은 것이다. 어릴 적 와루는 학급번호 1, 2번을 맡아놓을 만큼 왜소한 꼬마였다. 키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갑자기 크기 시작했다. 몸이 자라면 마음도 커줘야 할 텐데. 키는 컸지만 와루의 마음은 늘 세상보다 턱없이 작았다.
그래서 큰 덩치 안에 숨은 작은 와루는 만화 속에서 여전히 터무니없이 작은 몸집을 한 채 친구들과 해변으로 여름여행을 떠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눈 오는 날 혼자 영화를 보고, 짝사랑을 하고 엇갈린 인연을 만난다. 작가는 와루를 작게 그린 이유에 대해 “작은 마음 같은 거, 큰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마음의 주인공이 느끼는 거, 그런 걸 말하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와루는 초등학교 시절 ‘잘못 들어왔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 축구부에서 2년이나 버텼다. 미술부 모집에 손을 들려고 했는데 축구부에 손을 잘못 들었다. 동네 형이 ‘네가 맡긴 병아리는 잘 자라 자연으로 돌아갔다’며 이를 쑤실 때는 순진하게도 숲 속을 자유롭게 달리고 있을 닭을 상상했다. 이런 친구 얘기도 있다. 짝사랑 여학생에게 “○○가 너 좋아한대” 외치고는 “잘되면 내 덕인 줄 알아” 생색내는 친구 말이다. 어쩐지 학창시절 한번쯤 만난 것 같지 않은가.
이발사에게 바치는 이야기
와루가 만화가로 데뷔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림 그린 경력은 오래됐다. 학교 졸업 후에 몇 년간 만화가 문하생 생활도 해보고, 게임회사에 들어가 그림도 그렸다. 만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기억하는 한 ‘언제나’였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늘 만화를 그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만화가로 제 이름 걸고 그림만 그리며 살아야겠다는 확신은 최근에야 들었다. “한동안은 밥 먹을 돈도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취직 안 하고 그림으로 생계를 꾸리겠다고 결심한 건 무모한 선택이었죠. 이것저것 다른 일 하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건 인생을 허비하는 것 같았거든요.”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지난해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는 난생 처음 팬 사인회라는 것도 가졌다. 누가 올까 싶었는데 몇백명이 몰려들어서 4시간 동안 사인만 했다.
와루는 성인이 된 뒤 내내 허리까지 머리를 기르고 다녔다. 2주에 한번씩 머리를 잘라주던 이발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뒤 머리 자르는 일에 관심을 잃었다. 그렇게 8년간 머리카락을 방치하다가 귀를 덮는 길이로 자른 지 20일쯤 됐다. ‘오래된 사진’은 그 이발사 이야기로 마무리됐다.
“21년 동안 2주에 한번씩 머리를 잘라 주셨던 아버지, 이발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내 머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지난 일요일 아버지 산소에 벌초를 하고 왔습니다. 바람이 시원하더군요.” ‘이발한’ 커다란 봉분 옆에는 역시 작은 와루가 앉아 있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사진=최종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