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진영] 그래도 국세청이다

입력 2011-07-20 19:38


“세금 없이 부를 대물림하는 행위에는 반드시 국세청 세무조사가 뒤따라야”

지난 12일 국세청에서는 낯선 장면이 펼쳐졌다. ‘전국 조사국장 회의’라는 이름의 행사가 언론에 공개되고 이와 관련된 기자간담회도 진행됐다. 국세청 개청 이래 청장 주재의 본청 및 지방 국세청 조사국장 회의가 외부에 공표되고 그 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1년에 한두 번 하는 전국 세무관서장 회의 정도나 언론에 알릴 뿐 여타의 회의들은 드러내기를 꺼렸던 국세청으로서는 이례적이었다. 특히 조사국과 관련해서는 극도의 보안을 유지, 한때는 조사국 직원들의 명단조차 외부는 물론 국세청 다른 국 직원들에게도 비밀로 할 만큼 철저하게 통제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나섰을까? 이는 이날 발표된 회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국세청은 회의에서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을 차단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대기업 성실 신고 검증과 중단 없는 역외 탈세 근절 추진 등을 묶어 하반기 ‘3대 세무조사 역점 과제’라고 발표했으나 핵심은 ‘편법·변칙을 통한 부의 세습 엄단’이다. 따지고 보면 이 일은 국세청의 고유 업무이다. 경찰이 범죄자 많이 잡고, 군인이 나라 잘 지키는 것처럼 세무당국이 증여·상속세를 내지 않고 아버지, 할아버지 재산을 물려받는 행위를 철저히 단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국세청이 애써 홍보에 신경을 쓴 것은 이 업무가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공정’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공정은 ‘친서민’과 함께 MB 정부의 핵심 정책이다. 이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는 이현동 청장으로서는 앞장서서 구현해야 될 가치다.

국세청장이라고 같은 국세청장이 아니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관통하는 ‘적자(嫡子)’는 따로 있다. YS 때는 추경석. DJ 정부 당시는 안정남. 노무현 정부 시절은 이용섭 청장 등이 그들이었다. 이현동 청장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부 출범 당시에는 한상률씨가 청장이었고 이어 백용호 현 청와대정책실장이 청장으로 취임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거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이현동 청장을 본류로 잇는 징검다리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이런 맥락 등에서 본다면 국세청의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 차단’이 ‘내년 총선·대선 정국을 감안한 대기업 군기잡기 아니냐’며 삐딱하게 볼 수 있다. 대통령의 통치 이념을 가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국세청의 정무적 판단이 과도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수백억, 수천억 심지어 수조원의 회사 돈을 단 몇 푼의 세금 또는 아예 한 푼의 세금 없이 2, 3세들에게 물려주는 일부 대기업 악덕 사주들의 반사회적 행태는 더 이상 용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해지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최소한의 양식도 없는 이들에게는 세무당국의 강도 높은 조사만이 효과적 처방이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이 부를 창출하고 이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해 시장을 유지하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주창했다. 정부는 사회질서 유지나 침략으로부터의 보호, 인프라 시설, 선의의 공정한 경제를 위한 최소한의 담보 등의 행위를 제외하고는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연관 검색어쯤으로 ‘보이지 않는 발’이란 경제용어가 있다. 이는 기업이 특혜나 특권을 통해 경쟁 없이 손쉽게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주로 독과점이나 담합, 합병 등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지하경제’라고까지 질타한 재벌들의 대표적인 편법 증여 수단인 소모성 자재구매대행(MRO)은 ‘보이지 않는 발’의 상징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발’이 ‘보이지 않는 손’을 압도하는 천민자본주의가 공고해지고 있다. 그러하기에 정부의 적극적인 기능, 무엇보다 강골 국세청의 옹골찬 대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정진영 카피리더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