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정오 지나 황홀한 노을 기다리는…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펴낸 시인 도종환

입력 2011-07-20 17:44


올봄, 도종환(57) 시인과 밤 깊도록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서울 홍익대 앞 어느 음식점에서 열린 후배 시인의 시집 출간 모임에 갔다가 “나이 든 사람이 오래 앉아 있으면 민폐”라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그와 함께 밤길을 좀 걸었고 배가 출출해져 우동 집에 들어갔다. 아마도 지난한 이 시대의 속물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그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가면 막차가 있다며 자택이 있는 충남 보은으로 향했다.

“오늘도 막차처럼 돌아온다/ 희미한 불빛으로 발등을 밝히며 돌아온다/ (중략) / 내 안에도 눈꺼풀은 한없이 허물어지는데/ 가끔씩 눈 들어 어두운 창밖을 응시하는/ 승객 몇이 함께 실려 돌아온다/ 오늘도 많이 덜컹거렸다”(‘막차’ 부분)

도종환의 신작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에는 이렇듯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어김없이 제 자리로 돌아가 영혼을 담금질하는 시편들이 담겨 있다. 이 시집은 “내 인생은 하루 중 몇 시쯤인가”란 물음에서 시작했다고 시인은 말한다. 뜨겁고 치열했던 낮 12시 전후를 지나 오후의 시간은 의기소침한 채 지냈다고 했다. 저무는 시간만 남았는데 이대로 어두워지는가.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을 황홀하게 물들이는 시간이 한 번쯤 허락된다고 믿고 살자며 시인은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부분)

그는 1980년 광주 항쟁 당시 자신이 소속된 부대가 시민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언덕에서 M16 자동소총의 가늠자를 들여다보며 시민군이 오기를 기다렸던 비극적 체험의 소유자다. 그게 12시에서 1시 사이의 ‘벌레 먹은 자국’이지만 그 체험을 통해 그의 인생은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로 나뉜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내와의 사별, 벽지로의 좌천, 기나긴 해직 교사 시절. 모순투성이의 나날들은 그에게 온유하면서 강한 서정의 힘을 선사했다.

“지금도 내 마음의 마당 끝에는 꽃밭이 있다/ 내가 산맥을 먼저 보고 꽃밭을 보았다면/ 꽃밭은 작고 시시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꽃밭을 보고 앵두나무와 두타산을 보았기 때문에/ 산 너머 하늘이 푸르고 싱싱하게 보였다/ 꽃밭을 보고 살구꽃 향기를 알게 되고/ 연분홍 그 향기를 따라가다 강물을 만났기 때문에/ 삶의 유장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꽃밭’ 부분)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서도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고 사물을 관조하는 힘, 그것은 유장한 강물 같은 정신이 돼 그의 시적 체질을 이루고 있다. 그는 20세기라는 거창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의 마음은 늘 작은 꽃밭에 살고 있는 것이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 엎어/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래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바이올린 켜는 여자’ 부분)

인생의 저녁노을이 곱게 깔릴 도종환의 다섯 시 이후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