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수렁’서 건진 남편 사랑 새록… 소병필·장미정씨의 ‘부부 위기 극복기’
입력 2011-07-20 19:28
1983년 봄 어느 날 서울∼문산행 경의선 열차. 책가방을 든 학생들이 하나 둘 탑승했다. 수색역에서 외모가 남다른 한 남학생이 탔다. 두 정거장을 지나 능곡역에서 한 여학생이 탑승했다. 남학생의 시선이 여학생에게 멎었다. 둘은 함께 금촌역에서 내렸다. 여학생은 매일 같은 시간 열차에서 만나 같은 역에서 내리는 쌍꺼풀 예쁜 남학생의 이름이 궁금했다. 동네친구에게 물었다. ‘소병필’이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여름방학이 됐다. 남학생이 하루는 불쑥 여학생의 집으로 찾아왔다. 럭비 선수인 남학생은 말했다. “일찍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둘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결혼
지난 17일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에서 결혼 21년차인 동갑내기 집사 부부 소병필·장미정씨를 만났다. 이들은 23세 꽃다운 나이에 약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씨가 빨리 결혼식을 올리자고 채근했다. “아내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못한다고 했어요.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해놓은 건 없고. 덜컥 겁이 났어요. 결코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고 했어요.”
장씨도 할 말이 많았다. “결혼식을 서두른 이유는 시어머니가 혼인신고를 미리 해 놓으셨기 때문이에요. 청약저축에 가입해 아파트를 해주시겠다고 약혼식을 올리자마자 혼인신고를 하신 거예요. 늦춰질수록 여자 쪽이 손해잖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막상 결혼하고 나니 연애 때와 사뭇 다른 모습에 실망스러울 때도 많았다. 그러나 서로 맞춰가며 노력했다. 소씨는 2년 정도 항공화물을 다루는 직장에 다녔다. 이때 제주도에서 싱크대 설치 기사로 일하는 친구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고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제주도로 건너가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3개월간 싱크대 현장 일도 익혔다. 서울로 돌아와 가게를 차렸다. 소씨는 주일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러나 두 가지 원칙은 꼭 지켰다.
“토·일요일에는 꼭 가족과 외식하기. 여름에는 빨간 글씨로 된 날짜에 꼭 놀러가기였어요. 한번도 어기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못해봤으니까. 언제 못하게 될지 모르니까 아이들에게 꼭 약속을 지켜주고 싶었어요.”
나름대로 원칙까지 세우며 가족을 위해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았다. 소씨는 “돈이 따라와야지 잡으려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제일 싫었다”고 했다. 그는 가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부유하게 살지 못해 가족과 잘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금전적인 보상이 돌아왔다.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었고 사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돈 버는 재미도 잠시,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도박에 빠지다
97년 IMF 외환위기가 오면서 소씨의 사업에도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자 일감은 다시 늘었고 소씨는 공장을 열었다. 날로 사업이 번창하면서 돈과 시간이 따라왔다.
“수입이 늘자 남편이 한눈을 팔기 시작했어요. 2000년에는 호스티스가 나오는 술집에서 하루에 100만, 200만원을 가볍게 썼어요.”
유흥에 빠지며 일을 등한시할 무렵인 2001년 봄, 소씨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직원 두 명이 싱크대를 싣고 가다 교통사고가 났다. 둘 다 외아들이어서 걱정이 더했다. 현장에 가보니 운전자인 처남은 크게 다치고 조수석에 있던 직원은 사망했다. 인생이 허망했다. 죄책감과 삶에 대한 허망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란 생각에 방황이 시작됐다.
비수기까지 겹치면서 업체 사람들과 가볍게 시작한 화투가 도박으로 이어졌다. 끝을 봐야 하는 그의 성격 탓에 결국 다 잃었다. 하우스까지 찾아갔다. 도박에 빠지면 빠질수록 거짓말도 늘어갔다. 남편을 믿고 따랐던 아내는 사업이 잘 안 되는 줄로만 알았다. 결혼 초 분양받았던 작은 아파트에서 더 큰 평수로 이사했지만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줬다. 집값에 보태라고 시어머니가 주신 5000만원까지 사업자금으로 남편에게 건넸다.
뒤늦게 장씨는 남편이 도박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씨는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 번, 두 번 약속을 어겼다. 세 번째 어기고 나서는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죽음을 떠올렸다. 가족을 위해 생명보험이라도 가입하고 죽고 싶었으나 납입금이 만만치 않았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소씨는 집까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닥이 보이니까 이 집을 정리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나 혼자면 괜찮은데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차라리 이혼을 하고 다 주고 나가는 게 옳은 방법 같았어요.”
이혼하자는 소씨의 말에 장씨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제껏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가 살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자신이 남편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씨는 이혼만은 안 된다고 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남편 말만 좇아 살아왔던 장씨가 이제는 자기 말을 믿고 같이 가자고 남편을 이끌었다.
소씨는 아내를 따라 교회도 가보았다. 설교 말씀 중에 한 부분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스도인은 빚지고 살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여기저기 진 빚을 청산하고 나니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소씨는 너무 화가 났다.
“하나님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저를 붙들고 집으로 인도하실 거면 거기까지 가기 전에 빨리 잡아주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원망 아닌 원망도 해보았다. 힘들었다.
도박벽을 끊기 위해 남편을 치료 프로그램에 등록시켜야 하나 고민하던 아내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남편의 말을 믿었다. 제정신을 차린 남편은 한번 안 한다 하면 정말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악속을 지켰다. 그 후 절대 도박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때가 2008년이었다.
하나님께 돌아가다
장씨의 마음에는 늘 자그마한 신앙의 불씨가 있었다. 어릴 때 자신의 집을 개척교회로 내놓은 장로 아버지를 둔 덕이었다. 아버지는 교회 재정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자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야속한 마음에 교회와 멀어졌다. 그러나 ‘내 종교는 기독교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점점 변해가는 남편 때문에 돌파구가 필요했다. 2008년 지인으로부터 교회 전도프로그램인 ‘알파’를 소개받았다. 집 근처에 있는 홍익교회 알파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전 제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교회에 앉아 있어도 은혜가 안 되고 힘들었어요. 뭔가 잡고 싶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어요. 조이페스티벌이란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성령체험을 했으나 다른 사람처럼 뜨겁지 않았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넘쳤다. 설거지가 쌓여 있어 다른 때 같으면 화가 났을 텐데 찬송하면서 기쁨으로 설거지를 했다. 그때 알았다. 성령님은 자신의 성품에 맞게 조용히 찾아오셨다는 것을.
그때부터 교회 내 모든 프로그램을 열정적으로 찾아다니며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작정 새벽기도도 드렸다. 기도응답으로 2008년 6월 남편이 교회에 출석했다. 2009년 1월 남편의 등록을 권유했다. 소씨가 등록 후 새신자실을 찾아가자 목사님은 아버지학교와 알파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소씨는 순종했다.
“목사님의 음성이 하나님 음성 같아서 거절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학교에서 같은 그룹이었던 장로님을 통해 기도를 받으며 뜨거운 무언가가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주체할 수 없었어요.”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마음이 가득 채워진 소씨는 교회 봉사에 열중했다. 이들 부부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이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들 부부는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기에 주님이 포도나무 되심을 누구보다 확신한다. 균열이 생겼던 부부 사이에는 이제 하나님께서 든든히 자리하고 계신다.
고양=글 최영경 기자·사진 김지훈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