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아 사망 사건’ 재수사 요구 김순이씨 5년을 꼬박 딸의 죽음만 붙들고 살다
입력 2011-07-20 18:12
가뭄철 논바닥처럼 말라붙은 줄 알았던 눈에서는 아직 눈물이 나왔다. 김순이(61)씨는 죽은 딸의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다 눈시울을 붉혔다. 난도질된 딸의 부검 사진을 꺼내 놓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였다. 눈물을 틀어막고 싶었던지 김씨는 양손으로 두 눈을 눌렀다. 그 손에 피눈물이 찍혀 나왔더라도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원망과 비통함이 역력했다.
5년 전 오늘
2006년 7월 21일 오전 1시14분쯤 경기도 파주 교하읍의 한 아파트 현관 화단에서 김씨의 막내딸 정경아(당시 24)씨는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오전 0시30분쯤 706호 주민이 창밖에서 들려오는 ‘악’ 하는 비명에 베란다로 나가 땅바닥의 정씨를 처음 목격했다. 이씨에게서 연락받은 관리실 직원은 정씨를 확인하고 119에 신고했다. 정씨는 다리가 45도가량 꺾인 채 누운 상태였다고 그는 진술했다.
키 167㎝, 몸무게 65㎏의 정씨는 만신창이였다. 얼굴이 부었고 외쪽 눈두덩은 멍들어 있었다. 목엔 눌린 듯한 흔적이 보였다. 맨발이었다. 청바지 지퍼는 내려져 있었다. 화단의 소나무는 가지가 꺾여 있었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원은 관리실 직원의 진술과 달리 정씨가 엎드려 있었다고 했다.
고양시에 집이 있는 정씨는 전 직장 동료 배모(당시 30·여)씨 부부, 다른 동료 조모(당시 28)씨와 오전 0시15분쯤 아파트에 온 것으로 조사됐다. 배씨 부부는 701호에 살았다. 정씨는 전날 올케언니에게 “배씨 집에서 자겠다”고 했다. 그는 사건 당일 인근 업체에서 면접을 볼 예정이었다. 정씨 등은 아파트로 오기 전 각자 소주 1∼2병씩 마셨다. 정씨가 이틀 전 소개받은 남자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였다.
701호에서 정씨는 잠긴 방문을 두드렸다. 배씨가 정씨의 전 남자친구 이모(당시 27)씨와 통화하고 있었다. 배씨는 “경아가 술을 많이 마셨는데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며 있는 곳을 물었다고 이씨는 전했다. 이씨는 부산에 있었다. 배씨 남편이 전화기를 가로채 이씨에게 욕하고 끊었다. 정씨는 일행과 갔던 노래방 인근에서 배씨의 휴대전화로 이씨와 다퉜던 것으로 전해졌다.
배씨 등은 이후 정씨가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정씨가 손가방을 놓고 라이터를 가지고 나가서 담배를 피우러 간 줄 알았다는 게 배씨 등의 공통된 진술이었다. 이들은 정씨가 돌아오지 않아 10여분 뒤 아파트 주변을 둘러봤지만 찾을 수 없어 부산의 이씨에게 간 줄 알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투신자살로 결론지었다. 10층 높이의 아파트 비상 통로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봤다. 시신 발견 12시간 만이었다. 현장 지문 감식과 부검은 하지 않았다. 배씨에게만 참고인 진술을 받았다.
타살 의혹
김씨 등 유족은 타살 가능성을 제기하며 재수사를 요구했다. 수일 만에 받아들여졌지만 결과는 같았다. 정씨는 부검 후 화장됐다. 김씨는 사건에 더 매달렸다. 바라는 건 전면 재수사였다. 사건은 올해 초 김씨가 인터넷에 알리고 재수사 촉구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세간에 ‘정경아 사건’으로 회자됐다.
“악몽이었죠. 분노가 치밀었어요.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대로는 억울해서 살 수 없었어요.” 18일 경기도 고양의 자택에서 만난 김씨는 지난 5년을 악몽에 비유했다. 한숨이 깊었다.
김씨의 재수사 요구는 끈기인지 집착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어느 쪽이든 김씨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지금 도와주는 사람들이 손을 떼도 저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포기 못해요.”
김씨가 딸의 죽음을 타살로 보는 근거는 시신 상태, 추락 전 비명, 배씨 일행의 행적 등이다. 김씨는 누군가 성폭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정씨가 추락사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사건 초기 미흡했던 경찰 수사는 의혹을 키웠다. 타살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듯했다. 경찰은 유족 항의를 받고 현장 조사에 나섰다. 4일 만이었다. 정씨가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 장소에서 손과 발가락 자국이 발견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유족은 증거가 조작되거나 훼손됐을 수 있다며 믿지 않았다.
김씨는 비닐하우스 밀집지역에 가건물을 짓고 혼자 거주 중이다. 동거하던 작은 아들(32) 부부는 두 딸을 데리고 나갔다. 남편과는 2005년 사별했다. 밤낮없이 술을 마신 남편은 간경화증을 앓았었다.
김씨는 막내딸 정씨를 포함해 2남 1녀를 키웠다. 장남(36)보다 4년 먼저 낳은 첫딸은 이듬해 잃었다. 전북 진안의 시댁에 맡긴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당시 시누이에게 들었다. 키우지 못한 죄책감이 컸다. 막내 정씨는 10년 넘게 괴로워하다 얻은 딸이었다.
김씨의 집은 2009년 5월 화재로 주저앉았다. 화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정씨의 유품은 재가 됐다. 다시 세운 82.6㎡(25평) 크기의 공간은 방 2개, 화장실, 거실로 구분돼 있었다. 장판과 벽지, 화장실 타일 등을 김씨가 발랐다. 정씨는 “겨울에 너무 추워서 헌 보일러를 샀다.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실종된 일상
5년간 김씨는 딸의 죽음만 붙잡고 살았다. 경찰 검찰 국가인권위원회 청와대 등 유관 기관은 죄다 찾아다니며 1인 시위를 벌였다. 자살로 돼버린 딸의 사망을 원점에서 다시 수사해 달라는 탄원이었다. 악에 받쳐 화물차를 몰고 청와대로 돌진하려다 막혔고, 전시용 신문고를 두드리다 연행되기도 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 전까지 김씨는 직접 현장을 쫓아다녔다. 파주의 아파트를 오르내리며 상황을 재구성하고 주민을 상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탐문했다. 경찰이 정씨 신상을 파악하려고 탐문하면서 아파트 주민에게 ‘술집 여자가 임신한 채 돈이 없어서 자살했다’고 둘러댔다는 말을 그때 들었다.
김씨는 병원 영안실에 있던 딸을 꺼내 상처 부위를 촬영했다. 부검 장면도 가족 대표로 지켜봤다. 김씨는 “아들들에게 맡길 수 없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는데 하나도 안 놓치려고 들여다봤다”고 했다. 그는 대형 서점에서 법의학 책을 탐독했다. 딸의 상처와 자료 사진을 비교하며 원인을 추정했다.
김씨는 파계승으로 알려진 박모(71)씨에게 속아 수천만원을 뜯겼다. 박씨는 “한나라당 의원과 친하니 재수사되도록 도와주겠다”며 접근했다. 김씨는 은행 대출로 돈을 마련했다. 부산에서 경승(警僧) 노릇을 했다는 그는 총경급 경찰 간부와 2명의 중견 연예인, 가짜 국회의원 보좌관을 동원했다. 해당 경찰 간부는 “박씨가 식사하자고 불러서 나갔을 뿐 어떤 자리인지 몰랐다”고 김씨에게 해명했다.
사건 이후 김씨는 억대 빚을 졌다. 월 이자는 120만원 정도다. 김씨는 종이 상자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입은 월 20만∼30만원에 그친다. 사건 전에는 길이 40m, 폭 3m 크기의 비닐하우스 한 동에서 꽃을 키워 팔았다. 김씨는 “5년간 일을 안 하고 돌아다녀서 지금은 온통 풀밭”이라고 했다.
정씨가 죽고 김씨는 서울 강남의 소망교회에 등록했다. 여동생(53)이 권했다. 김씨는 인근 교회에 종종 갔었다. “목사님 말씀이 다 저를 위한 것 같았어요. 눈물도 나고. 요즘엔 계속 돌아다니니까 힘들어서 한동안 못 갔어요. 구역 식구들이 기도하러 오신다는데 집이 누추해서 오지 말라고 했어요.” 김씨는 보관 중인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기도가 필요할 때 불러 달라’는 내용이었다.
고양=글 강창욱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