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오종석] 이규형 주중 대사의 京劇

입력 2011-07-19 19:29


“(제갈량):나로 하여금 이 악물게 하는구나. 과장을 좋아하고 빈말로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나랏일을 그르치는구나. 내 명을 듣지 않아 ‘가정(街亭·지역 이름)’을 잃었으니 어리석지 아니한가….”

주말인 지난 9일 중국 외교부 산하 국제문제연구소 대강당. 이규형 주중 한국대사가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부하 마속의 목을 베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과정이 묘사된 경극(京劇) ‘실가정(失街亭)’을 부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이 대사는 화답으로 경극 한 곡을 더 불렀다. 이날 모임은 외교부 전·현직 고위 외교관들로 구성된 경극협회 회원 100여명이 자신의 경극 실력을 뽐내는 자리였다.

현직 외교 수장인 양제츠 외교부장과 리자오싱(李肇星·전 외교부장)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 외사위원회 주임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수준 높은 경극 2곡을 연창한 양 부장은 이 대사의 경극 실력에 감탄했다면서 “경극이 한국인에게도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대사는 이날 모임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됐다.

경극은 노래와 춤과 연극이 혼합되어 있는 중국의 전통극으로 고음이 많아 중국 일반인들도 배우기 쉽지 않다. 이 대사는 10년 전 주중 정무공사로 근무할 당시 배웠다고 한다. 당시에는 7곡을 완창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2곡은 완벽하게 소화한다. 이 대사가 전·현직 고위 외교관들과 함께 경극을 불렀다는 얘기는 곧바로 중국 외교가의 화제가 됐다. 일부 중국 언론들도 이를 소개하면서 ‘중국인 같은’ 대사로 친근감을 표시했다.

이 대사는 오는 23일 토요일엔 중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사무 특별대표와 골프약속을 잡았다. 이 대사는 부임 2개월 만에 10년 전부터 친밀하게 지냈던 푸잉(傅瑩) 외교부 부부장을 비롯해 많은 전·현직 고위관리들과도 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중국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이런 ‘관시(關係)’는 그의 외교활동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한·중 무역 관계를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질검총국장과 해관총서장 등을 최근 잇따라 만나 현안을 논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관시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식품의약품 안전과 해외무역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이들은 장관급으로 지금까지는 한국대사가 쉽게 만나기 힘든 인물들이었다.

한·중 관계는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지난해 양국의 인적교류는 600만명을 넘어섰고 교역량도 2000억 달러를 넘었다. 이 교역량은 한·미, 한·일 교역량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지역안보나 북한문제 등까지 고려하면 중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나라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양국 관계는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북핵 문제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한 이견 등이 원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상호신뢰가 부족한 탓이다.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6월 민항기 오인사격 사건 당시 공개브리핑에서 한국 영공을 지나는 민항기의 안전보장을 촉구했다. 한국 영공을 지나는 많은 나라들 중 유일하게 중국이 공개적으로 이 사건을 문제 삼았다는 것은 한·중 관계의 현주소를 반영한 것이다. 천빙더(陳炳德)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 지난 14일 중국을 방문한 김관진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15분 동안 미국을 비난하는 ‘외교적 무례’를 저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3년 동안 베이징특파원 활동을 하면서 많은 중국 학자들과 관리들을 접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비해 현 정부 들어 한·중 관계가 많이 소원해졌다”면서 우려를 표시했다. 일부 인사들은 한국의 진정성에 의혹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중국을 방문하는 많은 정치인, 정부 관계자들은 한·중 관계가 날로 발전하고 있다는 말만 했다. 아직도 상호이해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년은 한·중 수교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중 모두 더 많은 상호노력을 통해 근본적인 신뢰구축의 계기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베이징=오종석 특파원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