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15) 병원 개원 3년 만에 해외 의료봉사
입력 2011-07-19 19:18
지금 생각해보면 병원 개원 3년 만에 주저함 없이 해외선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받은 선교 DNA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CCC를 만난 것은 동인천중학교 2학년 때다. 197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던 엑스플로 74대회였는데 100쪽이 넘는 A4용지 크기의 전도훈련 교재에는 ‘사영리를 아십니까’ ‘성령충만의 비결을 아십니까’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서울 대방초등학교에 모여 일주일간 전도훈련을 받고 거리에 나서 전도활동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한양대 의대에 입학하면서 CCC 활동을 했는데 의과대나 간호학과 학생들은 아가페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매년 여름수련회와 원단금식기도회에 참석했고 민족복음화의 꿈을 담은 ‘그리스도의 계절’을 불렀다.
드디어 2004년 1월 설 연휴 태평양 서북부에 위치한 미크로네시아라는 섬나라로 향했다. 이곳은 괌 옆에 위치한 나라로 필리핀 동쪽에 위치해 있다. 76세의 아버지가 의료고문으로 같이하셨으며, 아내 김정신 권사와 물리치료사, 간호사 등 11명이 동행했다. 병원에서 선교대원의 왕복항공료와 체류비 등 일체를 지원했다. 항공료까지 부담시킬 경우 선교에 나설 수 있는 인력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괌에 내려 경비행기로 1시간 걸려 추크(chuuk)라는 섬의 소형 비행장에 도착한 다음 보트로 한참을 들어갔다. 이 나라는 4개의 큰 섬과 607개의 작은 섬들로 동서 방향으로 펼쳐져 있는데,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페팬섬과 모엔섬이었다. 배에서 내려 언덕에 있는 교회를 향하는데 원주민들이 전통복장을 하고 일렬로 서서 환영을 해 큰 감동이 있었다. 그곳은 생산활동이 거의 없어 국민소득이 2000달러 수준이었는데 미국의 원조만 받아서 그런지 햄버거와 콜라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비만으로 인한 고혈압과 당뇨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선교대원이셨다. 요즘 젊은 의사들이야 자신의 전공분야밖에 볼 수 없지만 아버지 시대만 해도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부인과와 신경외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등을 모두 도맡았다.
이 나라는 수도시설이 열악했다. 국립병원이라고 하는 곳도 양철지붕에서 내려온 물을 받아 시멘트로 된 공간에 모아 그걸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염증 부위의 고름을 짜내고 찢어진 살을 꿰매는 수술이 많았다. 괌 늘푸른장로교회의 후원으로 1000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이처럼 성과도 있었지만 금세 회의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일회성으로 선교 현지를 다니는 게 과연 도움이 될까. 간단한 약만 있어도 치료가 될 병이었는데 그냥 방치했다가 큰 병으로 확대된 사례가 너무 많다. 그렇다고 매년 와서 수술을 해준다는 것도 무리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게 진료소다. 굳이 의사가 상근하지 않더라도 간호사가 약이라도 꾸준하게 지급할 수 있다면 현지 주민은 물론 선교사의 선교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해 4월 3일부터 6일까지 진행된 라오스 선교는 무료 진료소로 방향을 틀었다. 현지 간호사 한명을 고용하고 거기에 들어가는 인건비와 약값을 우리가 대는 시스템이었다. 사실 저개발국 주민에겐 약만 잘 지급해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연휴를 이용해 나와 아내, 간호사 등 6명이 수도 비엔티안에서 수없이 밀려드는 환자를 치료했다. 5월에는 무료 진료소를 설치하고 ‘비엔티안 선한목자병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렇게 선교를 다니기까지 병원 내적으로 적지 않은 진통을 겪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