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세원] 소나기 단상

입력 2011-07-17 17:39


비가 오락가락하니 구름도 잔뜩 끼고 외출하고 싶지 않은 날씨였지만 오랜만에 모임이 있어 나갔다가 일행과 헤어져 주차한 곳으로 내려가는데 비가 또 내린다. 장마철이라 검은 구름 사이로 소나기가 쏟아졌다가 해가 나더니 또 퍼부을 기세다.

전에 버스정류장 앞에서 야채 파는 할머니를 뵌 적이 있는데 오늘도 그 자리에 계셨다. 아직은 빗줄기가 세지 않아서인지 비를 피하지도 않고 낡은 우산을 펴서 어깨에 걸치고 몸을 웅크린 채 작은 판자에 앉아 양푼 몇 개와 봉지에 담긴 물건이 비에 젖을세라 비닐로 덮고 완두콩을 작은 종지에 담고 있었다. 저거 다 팔면 얼마를 벌기에 빗속에 저리 계실까. 낡은 우산을 적시는 빗방울조차 애처로워 보였다. 비가 좀 더 세지면 피하시려나….

흙때 낀 손톱으로 까 담은 완두콩이 빗속에서 선명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완두콩을 사고 싶어 허리를 굽혀 우산 속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비 오는데 안 들어가시느냐 했더니 아직 팔 물건이 많아 더 계셔야 한단다. 가까이서 보니 거친 손과 달리 할머니는 고운 얼굴을 하고 계셨다. 공부 잘하는 손자 뒷바라지 하려고 날마다 나오신다는데, 지친 기색 없이 담담하게 삶을 이어가는 듯한 평안이 느껴져 나의 동정심이 너무 가벼운 것으로 여겨졌다. 애처롭게 바라보니 그리 보일 수밖에 없었나보다.

모든 것에 제철이 있듯 누구에게나 저만의 인생이 있다. 지금 이 시간만큼은 우산 밑에 앉은 자리가 세상의 전부로, 여기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할머니의 삶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나름대로 목 좋은 곳에 자리 잡고 눈에 잘 띄도록 상품을 진열하며 나름 판매전략도 짰을 것이다.

고단하기도 했을 삶을 남 탓할 것 없이 묵묵히 자족하며 살아내고 계신 할머니는 내일도 양푼에 야채를 담아 이 자리에 나올 것이다. 세상 사람이 꿈꾸는 안락함이나 성공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삶이지만 작고 초라해 보이는 일을 통해 손자가 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내고 있는 것이다. 깊은 주름이 덧입혀졌지만 야문 소망도 간직하고 계실 것이다. 아주 적은 수입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지혜 또한 터득했으리라. 어쩌면 날마다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아프면 안 된다고, 어떻게든 들고 나온 것은 다 팔아야만 한다고…. 열과 성을 다하는 할머니의 삶을 보며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열매의 크기가 작아도 최선을 다한 삶을 향해 시시하다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임에서 한 친구가 얼굴 튜닝 좀 했는데 몰라보겠냐고 물었었는데 할머니의 삶을 생각하며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삶을 튜닝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다 파신 날은 빈 양푼을 들고 기쁨으로 손자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시듯 앞으로 할머니의 삶이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는 날이 없기를 바라며 주름 사이로 행복한 웃음이 더 많이 피어나길 바란다.

김세원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