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13) 선교병원 세우려 의대 교수직 사양
입력 2011-07-17 17:29
2000년 말 충북 제천서울병원에서 근무하며 선교병원 설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다. 서울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창우 선생 잘 지내고 있었는가. 해외 유학 다녀왔으니 이제 학교를 위해 일 좀 해야지.” 한양대 의대 정형외과 과장님이었다.
“아니 교수님, 어떻게 아시고 전화까지 해주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모교 교수자리가 쉽게 나는 게 아닌 건 알지? 정형외과 교수님들이 모여 의논을 했는데 자네를 교수로 선발하자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네. 이제 학교로 들어오게.”
지금도 그렇지만 한양대 의대 교수직은 하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자리가 드물게 날뿐더러 외국대학 교환교수 프로그램 이수자, 타 의과대 교수만 지원할 수 있었다. 국제적 논문은 필수였고 무엇보다 교수 전원 만장일치의 동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하나님께 서원한 게 있었다. 선교병원이었다. 선교를 위해 물질과 인력, 시간을 총동원하는 병원 말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교수직 제의가 들어와도 그 자리를 탐내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했었다.
“교수님, 정말 무례하고 죄송한 말씀인 줄 압니다. 제가 조만간 선교병원을 설립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 지금 의대 교수직을 거부하겠다는 말인가?”
“예.”
며칠간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리는 게 예의지만 그땐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무릎관절 수술의 세계적 권위자인 헝거포드 존스홉킨스의대 교수님과 십자인대 수술의 세계적인 거장 후 피츠버그의대 교수님 밑에서 배우면서 후학을 길러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가면 학교 일정대로 움직여야 했고 연구에 집중해야 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선교를 위해선 시간뿐만 아니라 자금도 많이 필요했다. 교수를 맡게 되면 적극적인 선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는 선교병원을 존스홉킨스대 메이요 클리닉처럼 세계적인 인공관절 전문병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제천과 서울을 오가며 병원의 최적지를 찾았다. 10여 곳을 돌아봤지만 마땅치 않았다. 결국 서울 역삼역에서 가까운 오피스텔 2층 826㎡(250평)를 찾아냈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고 장충단성결교회에 출석하는 국민은행 지점장님이 선교병원의 취지를 듣고 좋은 조건으로 대출해 주셨다. 기적적으로 돈이 마련됐다. 큰 빚을 안고 시작했으니, 초창기엔 잠이 제대로 오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우리 부부는 1988년 결혼 이후 지금까지 마이너스 통장을 벗어난 적이 없다. 많은 돈을 선교와 헌금으로 드렸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정신 나갔다고 하겠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종신보험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병원 이름을 공모했는데 장모님이 ‘선한목자’를 사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지금이야 선한목자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회와 병원이 많이 생겨 평범해졌지만 그때는 아주 신선한 이름이었다. 병원 마크에도 양을 돌보는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넣었다. 제일 신경 쓴 곳은 기도실과 수술실이었다. 기도실은 하나님의 처소였고 수술실은 병원의 기관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고민 끝에 병원 한가운데 6.6㎡짜리 기도실을 만들고 십자가와 강대상, 의자를 설치했다. 당시 한국에는 미국 존스홉킨스대 같은 무균 수술실을 갖춘 곳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미8군 병원이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아내 벤치마킹했다. 29개의 병상도 갖췄다. 드디어 2001년 12월 22일 개원예배를 드리고 진료에 들어갔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