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희곡’ 심취 내 삶도 가네… 희곡집 ‘봄날은 간다’ 펴낸 젊은 극작가 최창근

입력 2011-07-15 17:37


서울 대학로에는 수많은 연극쟁이가 돌아다닌다. 배우, 스텝, 기획자, 그리고 관객들. 그 거리에서 가끔 젊은 극작가 최창근(42)을 만난다. 고개를 30도쯤 옆으로 꺾은 채 턱을 약간 치켜든 그는 말할 때도 그 자세 그대로이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키 175㎝에 몸무게 49㎏가 될 듯 말 듯한 깡마른 체구의 그가 희곡집 ‘봄날은 간다’(이매진)를 냈다. 희곡을 쓴 지 11년 만의 첫 작품집이다. 공연이 희곡으로 활자화되는 것은 변명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그만큼 텍스트에 자신이 없으면 묶지 못하는 게 희곡집이다.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2001년 우리극연구소의 ‘새 작가, 새 무대’ 공모에서 희곡 ‘봄날은 간다’가 당선돼 극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2002년 동아연극상 작품상, 2008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15일 서울 대학로에서 그를 만나 극작가로서의 고민과 꿈을 들어보았다.

-키에 비해 체중이 너무 안 나가는 것 아닌가. 대체 어떤 체질이기에.

“강원도 철암이란 탄광촌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의사이셨다고 하는데 저는 뵌 적이 없지요. 유복자로 태어난 거죠. 어머니는 장사를 해야 했기에 도회로 나가셨고 외할머니 손에서 길러졌는데 아마 그때 젖을 먹지 못해 지금껏 살이 안 붙는 모양입니다.”

-가난한 한국 연극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대학 땐 시를 쓰고 싶었어요. 졸업 후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희곡에 손을 댔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지요. 대학원에서 소설가 최인훈의 희곡세계를 석사논문으로 쓰면서 문학적인 희곡에 푹 빠졌어요. 최인훈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라는 작품은 문둥이 가족을 소재로 한 희곡인데 아주 시적이지요. 제가 가장 영향을 받은 극작가는 최인훈과 러시아 작가 체호프입니다.

-문학적 희곡은 대사 위주로 정서를 전달하는 장르라 연출가들이 손을 대기 힘들어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무대에 올릴 기회가 적은데 왜 문학적 희곡을 고집하는가.

“한국 연극계는 극성이 강한 작품들이 너무 많아요. 메시지가 강하고 외면적인 갈등을 추구하는 극적인 연극 말이지요. 비록 비주류이긴 하지만 대사 위주의 언어 연극 쪽의 작품, 좀 다른 연극을 추구하고 싶어요. 제가 쓴 글이 배우들의 몸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관객을 만나니까, 이보다 생생한 라이브 무대는 없을 겁니다.”

-자극적인 것을 찾는 게 연극계 트렌드가 되고 있다. 문학적 희곡은 그 틈새시장에서 겨우 고개를 들고 있는 처지인데.

“개인적으로 그런 시대적 요구를 쫓아가고 싶진 않아요. 일본엔 ‘조용한 연극’이라는 게 있는데 그냥 무대에서 나직나직 말하는 연극이지요. 대사만으로도 충분히 정서가 전달되거든요. 문학적 희곡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연극계는 시작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 극작가의 처지는.

“대부분 극작가들이 1년에 1편 정도의 창작극을 발표합니다. 그게 채택이 돼 무대에 오르면 편당 300만원 내지 400만원을 받는데 그 걸로는 먹고 살 수가 없지요. 그래서 방송드라마나 시나리오 쪽 부업을 하는데 일단 그쪽에 빠져들면 다시 극작가로 돌아오기 힘들어요. 희곡은 발표할 지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보니 요즘은 희곡이 문학의 일부로도 취급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희곡을 문학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서 책을 묶었습니다.”

(아직 장가를 못 간 그는 자취 생활만 24년째다.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시작해 서울의 대학 시절은 물론 지금도 대학로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성북동에 방 하나를 빌려 자취를 하고 있다)

-대학로의 순수 극작가는 몇 명 정도인가.

“100명 남짓이 아직 버티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희곡작가들이 소설 쪽으로 넘어간 사례는 많지요. 소설가 최인석 정미경 백민석 김종광 그리고 장정일 선배 등은 희곡으로 등단해 소설을 쓰고 있는 분들이지요.

-낭독 전문극단인 바이올렛 씨어터 제비꽃을 창단해 낭독문화 보급에도 나서고 있는데.

“제가 기획한 국내외 작가들의 문학 낭독공연 횟수가 10여 차례 됩니다. 올 초 독일에서 일시 귀국한 허수경 시인의 낭독회도 제가 기획했지요. 낭독은 카페나 미술관, 책방 등에서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외국에는 낭독이 카페 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았는데 우리도 그런 문화를 좀 더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곡에 대한 매력은.

“희곡은 나를 많이 비워둬야 하는 장르예요. 연출가, 배우, 스텝을 만나야 하니까. 그들의 의견을 수용해 무대에서 완성되어가는 텍스트가 따로 있지요. 수정할 부분이 계속 발견된다는 측면에서 인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극판에서 극작가를 너무 함부로 대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희곡에 목숨을 걸만 하지요.”

그는 최근 잡지 연재를 마친 ‘젊은 극작가의 세상읽기’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