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입력 2011-07-15 17:30
마가복음 8장 22~26절
우리 인간의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 지체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역할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의 눈은 보는 기능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보는 것을 통해 가질 수 있는 가치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눈이 ‘본다’는 기능적 이유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볼 수 없다면 오히려 맹인만도 못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뱃새다 지방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주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맹인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때 그 맹인이 대답하기를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사람이 이 정도까지만 볼 수 있다고 해도 현대의학에서는 수술 성공이라고 환호성을 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맹인의 말을 듣고 다시 안수를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맹인은 드디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본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장애를 딛고 일어서서 위대한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보되 바로 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걸어다니는 나무로 본다면 차라리 맹인이 낫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사람을 나무로 판단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간다면 그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 옛날 ‘마루타’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마루타’라는 말은 ‘통나무’라는 뜻입니다. 그 옛날 전쟁 시에 일본 사람들이 포로들을 잡아다 실험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마치 통나무처럼 보일러실에 땔감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가치를 통나무로밖에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극적인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참된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정치인들은 사람을 하나의 표로 계산합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이익 창출의 수단으로만 바라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조차 빈자리를 채우는 머릿수로 인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현대판 다윗의 인구조사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맹인의 눈을 두 번씩이나 안수하셨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반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주님으로부터 눈을 안수 받아야 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고 탄식하셨습니다.
본문의 맹인이 다시 한 번 안수를 받게 되자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제대로, 밝게, 그리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사람을 보되 인격체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잃은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으시는 우리 주님의 눈입니다. 그리고 나무를 사람으로 보면 절대로 안 됩니다. 나무는 어디까지나 나무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인간의 가치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것입니다. 이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진섭 고촌중앙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