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은영] 전화를 걸며

입력 2011-07-14 19:10


보고 싶다. 떨어져 있음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전화를 찾으며 시차를 따져 본다. 충분히 받을 수 있을 시각. 전화가 울리더니 반가운 아들 목소리 대신 미안하다며 다음에 전화하라는 여자 목소리만 들린다.

내 아이와 나 사이를 갈라놓는 영어로 말하는 이 여자. 나는 괜히 싫다. 그래도 몇 년 전 딸한테 전화했을 때보다는 조금 덜 싫다. 아들은 전화 연결이 안 돼도 걱정이 덜 되니까. 딸이 가 있을 때는 연결이 안 되면 걱정 반 그리움 반 뒤죽박죽 그런 꿀꿀이죽이 없었다. 혹시 교통사고라도 났나? 총이라도 맞았나? 딸이기 때문에 생기는 걱정이 꼭 덤처럼 얹혀졌다.

딸은 엄마가 남동생과 자기를 차별한다고 가끔 투덜댄다. 남동생에겐 귀가 통금시간도 여행도 더 너그럽단다. “네가 육체적으로 남자보다 약한 여자니 어쩔 수 없어.” 나는 차별이 아니고 차이임을 강조한다. 지금은 양성평등시대, 나도 딸 아들을 똑같이 키우려 한다. 하지만 딸이 더 조심스럽다. 여자를 꽃으로 보는 이상시력을 가진 남자들 때문이다.

나는 다시 아들 번호를 누르고 전화벨이 울리는 동안 별 생각을 다 해본다. 꽃을 보면 누구나 예쁘다고 느껴. 그리고 3단 고음이 아닌 3단 감정이 움직여. 보면서 기쁜 1단계, 만져봐야 기쁜 2단계, 꺾어 가져야 기쁜 3단계. 3단계에서 삐∼ 양심경고음이 울리지만 꽃을 꽃으로 본 정상 시력이라 큰 문제는 없어.

내 생각은 이상시력의 남자에게 넘어간다. 그들은 꽃이 아닌 여자를 보고도 3단 감정이 작동해. 2, 3단계에 울리는 법적 경고도 그들을 막지 못해. 직장상사와 부하 사이, 사제 사이, 의사와 환자 사이, 학교 동료 사이에서도 물의를 일으키지. 최고 지성 의대생들까지 믿을 수 없으니 딸 가진 부모는 늘 노심초사, 전전긍긍이다.

물론 순결이 최고선이던 시대는 갔고 남성들 의식 또한 상당히 높아졌다. 그런데도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 딸 가진 나를 불안하게 만들까?

전화는 계속 울리고 생각은 또 한 번 가지를 뻗는다. 우리 사회가 성 추행범에 대해 너무 관대했어. 여성을 꽃으로 보는 시선을 인정해 줬고, 남자는 원래 그렇다며 남성성을 내세웠지. 초미니스커트를 입었다며? 여자가 꼬리를 쳤겠지. 술김에 그럴 수 있지. 많은 원인을 여자와 술에게 덮어씌웠어.

교육에도 잘못이 있지. 공부만 잘하면 모든 잘못을 덮어주고, 학우를 함께 가야 할 동료가 아니라 물리쳐야 할 경쟁자로 여기게끔 내몰았지. 이런 교육이 우리 아들들 중 몇을 동료를 동료로, 제자를 제자로, 환자를 환자로 보지 못하는 정신적 이상시력자들로 만들어버린 게 아닐까?

딸깍, 전화 벨소리가 그치며 내 생각도 가지치기를 뚝 멈췄다. 그러나 반가운 아들 목소리 대신 또 여자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다음에 다시 하란다. 그래, 남잔데 별일 없겠지. 나는 쉽게 전화걸기를 단념했다. 딸이라면 한참을 안절부절못했을 텐데…. 아들아, 누나보다 너를 덜 사랑하는 게 아니란다. 알지?

오은영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