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12) 유학의 최대 성과는 ‘선교 열정’

입력 2011-07-14 20:50


후 박사님은 결국 하버드의대 루바시 교수님으로부터 내가 피츠버그대에 더 머물러 있어도 좋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후 박사님과 나는 하루에 13건 정도의 수술을 했다. 약 2년 동안 십자인대 재건술과 연골재생술, 연골판 이식수술을 2000회 가까이 한 것 같다.

세계 정상급 명의와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니 확실히 의술의 지평이 넓어졌다. 후 박사님은 의술 외에도 미국의 고급문화를 보여주고자 배려해 주셨다. 그는 백인 상류층을 위한 프라이빗 클럽으로 나를 불러냈다. 월세 565달러 짜리 반지하 아파트에 거주하며 몇 달러를 아끼기 위해 신문 쿠폰을 모으던 우리 부부가 집세보다 비싼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상류층 파티에 참석한 것이다. 식사를 하고 있으면 발레리나들이 바로 옆에서 춤을 추며 자선 모금을 하는 그런 곳이었다. 박사님은 두 아들을 위해 야구와 풋볼 아이스하키 시즌티켓을 구해 자주 데리고 다녔다.

교회는 피츠버그에 있는 마운트 레바논 감리교회를 다녔다. 전부 백인들만 다니는 교회였는데 유색인종이라곤 나와 아내, 두 아들뿐이었다. 노인이 대부분인 교인들은 우리 가족이 교회에 들어서자 신기한 듯 쳐다봤다. 당시 장인어른인 김선도 광림교회 목사님은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을 지내시고 1996년 5년 임기의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에 취임하신 상태였다. 담임목사님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미국 감리교대회에서 김 목사님을 뵌 적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하나도 쓰지 못할 게 없더라.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고 오너라.” 미국 유학을 그토록 꿈꾸셨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늘 이런 충고를 하셨다. 아버지 말씀대로 존스홉킨스대학병원과 피츠버그대학병원에 있으면서 골종양학과 줄기세포 연구에도 동참했다. 골종양학은 프라시카 교수님, 줄기세포 연구는 휴어드 박사님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공과목과 동떨어진 학문이었지만 환자를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적지 않은 통찰력을 준 자양분과 같은 시간이었다.

피츠버그 의대에 머무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연히 하버드 의대 객원 연구원 기간이 줄어들었다. 나는 99년 9월부터 2개월간 짧게 메사추세츠 제너럴 하스피털 정형외과에서 객원 연구원 생활을 했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시기가 다가왔다. 그해 12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아내와 나는 두 손을 붙잡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미국 땅에서 많은 것을 배우도록 도와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학문적인 것도 있지만 제일 크게 배운 것은 우리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한국에 돌아가면 선교에 열심을 내겠습니다.”

정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최선의 때에 최고의 사람을 통해 우리 가족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다. 우리 네 식구는 12월 31일 오후 10시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도착했다.

누구는 ‘강남 한복판에서 병원 간 별들의 전쟁이 벌어지는 판에 미국 명문 의대 연수 사실을 왜 적극 홍보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지금도 내 실력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좋은 기회를 주신 것은 분명 ‘평생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모든 일에 나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목자병원 개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