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7-14 17:33
종교개혁운동의 역사적 전개 과정(2)
칼뱅은 1538년부터 1540년까지 3년 동안 제네바 시민들의 반대로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불어 회중을 목회하고 신학강의를 했다. 마틴 부처(Martin Bucer)와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등과 깊은 친교를 나누기도 했다. 1539년 ‘기독교강요’ 개정판에 ‘크리스천의 삶’(The Life of Christian Man)이란 부분을 추가했다. 자기부인(self-denial), 십자가 지기(Bearing the Cross), 천국생활에 대한 명상(Meditation on the Heavenly Life), 현재생활의 사용과 즐거움(The Use and Enjoyment of this Present Life) 등 성화론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1539년 로마서주석을 출판했다. 1540년 8월 스트라스부르의 칼뱅 목회의 교인이었고, 칼뱅의 병을 잘 간호해 줄 수 있었던 간호사였으며, 두 자녀의 어머니였던 과부 뷔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 낳은 세 자녀들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하였고, 뷔르도 일찍 사망했다(1549년). 1541년 9월 2일 다시 제네바 최고 정치회의의 초대를 받아 종교개혁을 이끌어 가게 됐다. 이때도 망설이는 칼뱅을 파렐이 강권해 제네바에 오게 된 것이다. 네 명의 최고 정치회의 회원들이 모두 칼뱅 지지파들이어서 제네바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1542년 14년간의 구약적 신정정치를 실현하는 운동의 모체가 되는 교회회의(consistory)를 조직했다(12명의 평신도 장로와 9명의 목사로 구성하였으나, 1564년에는 목사가 19명이 됨).
1550년 칼뱅이 행한 종교적 파문에 대한 강한 반발이 칼뱅의 반대자들에 의해 증가했다. 1553년 그루에트(Jacques Gruet, 1547년), 모네(Paul Monenet, 1549년) 등에 이어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를 삼위일체 부인의 죄목으로 처형했다. 결국 칼뱅에 의해 종교재판을 받아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이 76명, 처형당한 사람들이 58명(간음, 이단, 신성모독 등)이었다. 칼뱅은 신정정치의 입장에서 제네바를 성시화하는 사회적 성화운동을 전개한 셈이다.
1555년 제네바 시민권을 얻게 됐다.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 of Geneva)를 설립해 신학을 가르치게 됐다. 1559년 기독교강요 완성판을 출판했다. 1564년 5월 27일 55세를 일기로 교회정치가, 종교논쟁가, 교육가, 저술가, 신학자, 종교개혁가로서의 일생을 마쳤다. 칼뱅은 안수 받은 성직자는 아니었으나 제네바에서 4000번 이상을 설교했다(매년 170회 이상 설교함). 270회의 결혼을 주례했고, 50회의 세례를 거행했다. 그 자신의 진술해 의하면 그의 질병은 관절염, 신장결석, 병명이 불확실한 내장 이상, 치질, 위출혈, 고열, 근육경련, 신장염, 사지에 염증을 일으키는 통풍 등이었다.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병이 많았으나 은총으로 종교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칼뱅이 제네바 종교개혁에서 남긴 중요한 업적 세 가지는 잘 교육받고 훈련받은 목회자를 공급한 것, 프로테스탄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타당성을 제시할 수 있는 신학적 터전을 마련하여 준 것, 제네바가 유럽의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보루요 피난처가 되며 사회적 성화의 모델이 된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김홍기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