休∼ 독서고수 6인 추천 휴가지서 읽을 만한 책
입력 2011-07-14 17:54
휴가 때 당신의 독서 유형은? ①과시형=휴가지까지 꾸역꾸역 800쪽 짜리 교양서를 들고 갔다가 3쪽쯤 읽고 책만 구겨서 돌아온다 ②수집가형=잔뜩 책을 사들인 뒤 독서는 책 제목으로 대체한다 ③1위 추구형=밀린 공부하듯 베스트셀러를 열독한다 ④고전파=톨스토이와 괴테 정도는 읽어야 독서지! ⑤장르형=추리, 공포, 로맨스소설이 아니면 머리 아파.
휴가와 책. 호떡 속 설탕처럼 없으면 서로 서운하다. 떠날 때 손에 책 한 권 없다면, 방바닥을 대책 없이 뒹굴 때 책마저 없다면 넘치는 시간은 끔찍해질 터이다. 몸 떠날 궁리 말고 마음도 같이 쉴 계획을 세워보자. 좋은 책을 썼고 그보다 더 많이 좋은 책을 읽어본 저자이자 독서 고수 6명이 여름휴가 때 옆에 두면 좋을 책 3종씩을 골랐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암벽 등반하듯 힘들여 존재를 읽어보자
‘다른 십대의 탄생’ 저자 김해완
낭만적 로맨스를 꿈꾸는 휴가지에서 사랑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라고 권하는 건 악취미일까. 밀란 쿤델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을 읽으면서 평소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보았던 ‘사랑’의 표상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로맨틱한 고백도 달달한 데이트도 없다. 네 남녀는 말없이 떠나서 영영 만나지 않는가 하면, 평생 같이 살면서 불륜과 질투로 서로를 괴롭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이것 또한 사랑이라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랑할 때 지금까지 고집해왔던 내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그리고 그 허물어진 자리에 상대가 들어온다. 어쩌면 사랑은 특별한 감정이라기보다 내 옆에 상대가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인지 모른다.
16세기 이단재판소에 선 한 방앗간 주인의 실제 사건을 다룬 미시사의 대표저작.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문학과지성사)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왕조나 정치가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기존 역사책에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신선한 역사책이다.
암벽 등반하듯 힘들게 하는 독서도 때론 나쁘지 않다. 분자생물학자인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궁리)은 과학에 별 상식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좀 뻑뻑하다. 그러나 책의 결론 부분에 가면 노력이 아깝지 않다! 우리가 이 우주에서 존재하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혹시 나란 존재를 이 우주 속에서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쓰고 종교와 철학을 붙들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 바라보고 있던 세계가 넓어진다.
가방에 쏙 들어가는 작은 책 ‘깊은 여운’
‘네 멋대로 해라’ 저자 김현진
‘남쪽으로 튀어!’ ‘공중그네’ 등을 낸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는 스포츠에 관한 글을 묶어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책을 내기도 한 야구팬이다. ‘야구장 습격사건’(동아일보사)은 회사에 갈 필요 없는 40대 독신남 오쿠다 히데오가 야구 보러 일본에서 타이완까지 어정거리는 내용의 여행기다. 야구 본 이야기이기도 하고, 야구 본 이야기면서 여행기이기도 하면서, 먹고 다닌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없이 심심해하고 자기가 심심하다는 걸 도무지 감추지 않아서 휴가고 여행이고 누구 말마따나 그냥 별일 없이 사는 거라는 걸 잘 알려준다. 그래도 야구팬이라면 피식피식 웃으며 즐거워할 것이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열림원)는 세상을 뜬 서강대 영문학과 장영희 교수가 생전에 당신께서 우리말로 옮긴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작품이건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단숨에 읽고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참 여운에 잠겼던 소설이다. 여행 가방에 쏙 들어갈 만큼 가벼운 책인데 작품은 가볍지 않다. 기묘하고 뒤틀리고 섬뜩하고, 그래서 더 이상하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작고 위대한 소리들’(실천문학사) 역시 휴가지에 들고 가기 딱 알맞은 작은 책인데, 말 그대로 작아도 위대한 소리들이 담겨 있다. 작가이면서 농부인 데릭 젠슨이 신학자, 심리학자, 아메리카 원주민, 환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경청한 ‘작고 위대한 소리들’이다. ‘자기 영혼을 되찾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심하는 것이고, 하나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죠. 흔히 두 가지 일은 동시에 벌어지지요’라는 구절이 마음을 울린다.
칼럼니스트
사랑은 장마·모기떼도 우습게 넘어간다
‘7년의 밤’ 저자 정유정
최근 출간된 게 아닌 꽤 오래 묵은 소설들로 골랐다. 그중에는 장르문학이라 부를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인간과 인생의 본질을 다룬 작품들이다. 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모두 소설 읽고 영화를 나중에 봤다.
스티븐 킹의 ‘스탠 바이 미’(황금가지)는 소설집 ‘사계’의 하권으로, 가을과 겨울 편이 실려 있다. 내게 정말 큰 영향을 준 소설이다. 소설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가르쳐줬다. 스릴러 대가인 킹의 진짜 문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가을 편은 성장소설의 고전이라 할만하다. 죽음을 통해 세계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소년들의 쓸쓸하고 아름다운 1박2일을 담았다. 겨울은 킹 특유의 서스펜스와 고딕 풍 호러, 모성이라는 신화가 만나 섬뜩하면서도 기이한 슬픔을 자아낸다.
인간에게는 사악함 혹은 타락에 대한 자유의지도 있을까. 이걸 약물로 강제 조정한다면? 불편한 이야기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다. 인간본질의 심연으로 들어갈 기회를 잡게 될 테니.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민음사)는 반성장소설의 고전이다. 작가의 자기표현은 문장이 아니라 어느 대가의 말마따나 이야기를 축조해가는 인물의 선택과 행동으로 구현된다는 걸 보여주는 교본이기도 하다. ‘나는 세상을, 인생을, 인간을 이렇게 바라본다’라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북하우스)은 느와르의 고전이다. 이 책으로 하드보일드의 매력에 푹 빠져보시라. 필립 말로의 발가락마저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은 국경만 넘는 게 아니다. 더위와 장마, 모기떼도 우습게 넘어간다.
소설가
한 권으로 지적 포만감 느끼고 싶다면
‘탐서주의자의 책’ 저자 표정훈
제목 들어본 사람은 많아도 읽어본 사람은 드문 책이 고전이라 했던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휴먼앤북스)은 그런 의미에서 고전 중 고전이 아닐지. 역사는 이야기여서 재미있고 이야기 가운데는 역시 사람 이야기가 으뜸이라면, 위대한 그리스인 한 사람과 로마인 한 사람을 짝지어 생애를 서술하는 이 책이야말로 진정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책이다. 인간사와 세상살이에 관한 교훈을 건질 수 있다는 게 덤이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푸른숲)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작가 페터 빅셀의 에세이집이다. 속도와 효율의 기준으로 보자면 평범하고 느리며, 때로는 뒤처진 듯한 삶의 모습과 순간들을 담담하면서도 울림이 크게 포착해낸다. 작가가 말한다. “의미 있는 일만 해야 한다면 인생은 삭막해진다. 일기장에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었음’이라고 적은 그 오늘도 상황에 따라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을 수도 있을 테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어느 오후. 파라솔 아래 늘어져 즐기는 휴식 같은 독서. 이런 걸 꿈꾼다면 챙겨볼 만한 책이다.
한 권의 책으로 지적 포만감을 느끼고자 한다면, 다양한 분야에 지적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단연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의 ‘지(知)의 정원’(예문)이다. 일본의 대표적 독서가인 두 저자는 광범위한 주제에 걸친 독서 편력과 교양, 학문, 그리고 세계에 관해 솔직하고 날카롭게 대화한다. 저자들의 대화에서 책 읽기와 세상읽기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무뎌진 지적 수준을 제고하기 위한 자극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번역저술가
모처럼 휴식, 어려운 책과 씨름할 텐가
‘문재인의 운명’ 저자 문재인
사회과학 서적도 좋아하지만 딱딱하고 골치 아프지 않나. 휴가기간에는 소프트한 책이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걸로 골라봤다. 글 자체가 대단히 재미있고 주제도 무겁지 않으니 휴가기간에 편하게 읽기 좋을 거 같다. 교양도 풍부해지고. 특히 그림이라는 게 그냥 보면 잘 모르다가도 책을 통해 보면 더 재미있어지지 않나.
강명관의 ‘조선 풍속사1∼4’(푸른역사)는 조선 풍속화를 통해 풍속사를 연구한 책이다. 학계에 풍속사에 대한 연구가 잘 없다. 이 책은 그림을 사료로 삼아 풍속을 말하니까 흥미진진하면서, 우리 옛 그림을 보는 눈도 갖추게 해준다. 좋은 책이다. 평도 아주 괜찮았고. 시리즈의 부제는 ‘조선 사람들, 단원의 그림이 되다’(1권) ‘조선 사람들, 풍속으로 남다’(2권)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3권)이다. 3권부터 단행본으로 하나씩 나온 뒤에 ‘조선 풍속사’로 나중에 묶여 나왔다. 다른 책인 줄 알고 또 살 수 있으니, 그래서 부제는 꼭 달아줘야 한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2’(솔)는 그림 감상하는 법뿐만 아니라 옛 그림에 담겨있는 선조의 인생관과 우주관까지 배울 수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6-인생도처유상수’(창비)도 꼭 추천하고 싶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답사기 중 가장 최근에 나온 건데 나이랄까, 그동안 살아온 경륜이랄까, 청장 역임한 경험까지 덧보태져서 글이 훨씬 더 깊이가 깊어졌다. 그냥 답사기를 넘어서는 것 같다. 문화재를 읽는 안목과 함께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까지 갖게 해준다.
노무현재단 이사장
‘냉담한 세계’ 엄청난 풍류를 즐겨보자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저자 손철주
프랑수와 줄리앙의 ‘무미예찬’(산책자)은 프랑스 철학자가 중국 문화의 키워드인 담(淡)에 대해 파고들어간 에세이다. 저자는 무미(無味), 그러니까 맛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얘기한다. 말하자면 ‘맛있는 맛없음’이다. 사람들은 풍류가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 속에 있는 줄 안다. 하지만 ‘냉(冷)’하고 ‘담(淡)’한 것의 세계에 엄청난 풍류가 숨어있다. 냉담 속에 무한한 풍류가 깃든다는 말도 있다. 어려운 얘기일 수 있는데, 이걸 상당한 정서와 논리로 추구해간다.
더운 여름날 박철상의 ‘세한도’(문학동네)를 읽어두면 찬 겨울을 나는 지혜를 챙길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왜 조선 후기 최고의 명품인지를 설명한다. ‘세한도’의 태생과 계보, 이를테면 작품 하나의 족보를 꼼꼼하게 추적해간다. 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책 한 권을 완성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걸 아주 꼼꼼하게 제대로 해냈다. ‘세한도’ 완전정복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조선 후기 문인 조수삼(1762∼1849)의 ‘추재기이’(한겨레출판)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조선 하층민의 일화를 모은 책이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번역했다. 내용이 소략해서 치밀하거나 자세하다고는 할 수 없는 책이다. 나는 하층민에 대한 그런 짧은 기록이 오히려 스토리텔링 자원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스토리텔링에 목말라하지 않나. 스토리라는 건 널려 있다. 무궁무진하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건 말해주는 사람, 텔러이다. 이 책이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 시대에 이야기하는 방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학고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