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한국판 플리바기닝
입력 2011-07-13 21:36
‘수사는 배신에서 출발한다’는 말이 있다. 특수 수사를 주로 하는 검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가령, 기업인 횡령사건의 경우 경리담당 직원의 진술이 결정적이다. 경리 담당이야말로 사장이 회삿돈을 얼마나 떼먹었는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뇌물사건도 마찬가지다. 돈을 준 사람의 진술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그래서 검사들은 “형을 면제해 줄 테니 돈을 받은 사람 이름을 대라”며 뇌물공여자를 다그치기도 한다.
실제로 돈을 준 사람을 고자질하고 자신은 처벌을 면제받은 사례가 있다. 김영삼 정권 초기 이른바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된 박철언 전 의원의 경우 그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한 정덕일(슬롯머신의 대부 정덕진의 동생)씨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처럼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제도가 우리나라에도 도입될 모양이다.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내부증언자 형벌감면제’는 표현만 다르지 플리바기닝 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 등에서 시행 중인 플리바기닝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형을 감면받지만 한국판 플리바기닝 제도라 할 수 있는 형벌감면제는 여러 사람이 관여한 부패·조직폭력·마약범죄와 관련해 범죄 규명에 크게 도움을 주는 증언을 한 가담자를 기소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고자질이나 배신은 건전한 사회에서 장려하거나 칭찬할 만한 사안은 아니다. 부인이 남편을, 회사 직원이 사장을 고자질하고 친구를 배신하는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수사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범죄를 고자질하는 배신자가 오히려 칭찬받는다. 고자질의 역설이라고나 할까.
정부가 마련한 한국판 플리바기닝은 이런 의미에서 정의(正義)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수사하기가 쉽지 않은 조직폭력이나 마약범죄를 뿌리 뽑는 데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검사가 증거를 찾는 데 열중하지 않고 용의자를 꼬드겨 유리한 증언만 받아내는 데 집중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범죄 제보를 하기 싫은데도 검사의 강요나 회유에 의해 고자질이나 배신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 당사자의 인권침해가 문제 된다.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그래서 제기되는 것이다. 모든 제도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판 플리바기닝도 운영만 잘 하면 범죄를 캐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