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생태계 보고’ 서북능선 군락지… 설악산 분비나무 수천그루 枯死 미스터리 ‘온난화의 습격’

입력 2011-07-13 18:39


우리나라의 높은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주목, 구상나무 등의 고사목은 고산지대의 운치를 더한다. 그러나 고사목 여러 그루가 한 곳에 떼 지어 몰려 있는 모습을 보면 심란해진다. 지금 설악산 서북능선 분비나무 군락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주말인 지난 9일 아침 일찍 설악산에 올랐다. ‘생태계의 보고’인 서북능선의 다양한 식물과 분비나무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한계령을 출발해 서북능선 삼거리를 지나 귀때기청봉 쪽으로 향했다. 서북능선 삼거리에서 귀때기청봉에 이르는 길은 약 0.7㎞. 해발 1578m인 귀때기청봉에 200m가량 못 미친 곳, 해발 1300m쯤에서 키 큰 고사목이 눈에 띄었다.

소나무과 전나무속의 상록침엽수인 분비나무다. 구상나무와 같은 과, 같은 속이지만 전국 고산지대에 분포하는 구상나무와 달리 주로 설악산 이북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등산로를 조금 벗어나 귀때기청봉의 남서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크고 작은 고사목이 여러 그루 나타났다. 고사목과 고사가 진행 중인 나무가 한데 섞여 있었다. 분비나무 떼죽음의 현장이었다.

지름 10㎝ 이하 어린 나무도 이미 고사했거나 고사가 진행되고 있어 분비나무가 자연수명을 다해 죽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3㏊가량 군락지에서 고사했거나 고사가 진행 중인 나무는 1000그루 이상이었다. 지름 40∼50㎝의 수백년 묵었을 고사목도 발견됐다. 잎이 연두색인 어린 나무가 거의 없어 이 군락은 머잖아 사라질 것으로 우려된다.

분비나무 집단고사 원인은 기후변화로 인한 아고산대 수종의 후퇴가 가장 유력하다. 한라산 구상나무가 해발이 낮은 곳부터 급속히 위축되는 것과 같은 이유다.

대청봉 근처에도 분비나무 군락이 있지만 고도가 더 높은 봉우리 근처에는 고사목이 귀때기청봉 근처에 비하면 적다. 귀때기청봉 근처의 고사목을 손으로 만지면 쉽게 부스러져 죽은 지 이미 수십년이 지난 것도 있다. 온난화가 진행된 시기와 고사 시기가 얼추 맞아떨어진다. 이곳의 수많은 고사목은 그동안 급속히 진행된 지구온난화의 증표인 셈이다.

기록상 지난 수십년간 이곳에 화재가 났던 적은 없다. 다른 나무와의 경쟁이라는 분석은 설득력이 없다. 이곳에서는 분비나무가 지배적인 종이다. 키가 6∼7m까지 자라는 큰 나무다. 털진달래, 눈측백나무, 붉은인가목 등 작은 키의 나무가 분비나무 군락의 하층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나무의 수명이 다했다는 가정은 어린 나무도 말라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어 설득력이 없다.

2008년부터 2년간 설악산국립공원에서 분비나무를 관찰해 온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사무소 권재환씨는 “서북능선이 여름철 온도가 높고 봄철 건조기에 습도가 낮은 편이어서 생장에 나쁜 영향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씨는 “특히 고사목이 많은 곳은 여름철 섭씨 31도까지 올라가고 28도 이상의 기온이 100시간 이상 지속됐지만, 분비나무 생장이 활발한 설악폭포 부근은 최고 기온이 24도를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2년 전부터 설악산 분비나무 군락지의 실태와 고사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서북능선, 관모능선 및 설악폭포 등 3곳에 조사구를 설정하고 모니터링에 들어갔다.

설악산=글·사진 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