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조용래] 노인과 퇴직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입력 2011-07-13 21:37
“자립, 참가, 케어, 자기실현, 존엄 등에 입각해 가치 있는 삶을 실현할 수 있어야”
스가야 히로시(菅谷博)씨는 30여년 근무했던 일본 농협에서 2005년 60세 정년을 맞아 퇴직했다. 올해 66세인 그가 지난달 서울 방문을 앞두고 연락을 해왔다. 30년 가까운 교류가 있던 터라 오랜만에 서울에서 반가운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이번 그의 방한은 각별하다. 지금까지는 관광이 주목적이었으나 이번엔 어학연수다. 그는 지난달 23일부터 연세대 한국어학당 ‘여름학기 10주 코스’에 다닌다. 석 달 미만의 단기 체류라서 비자 없이 입국은 했지만 목적으로만 보면 유학생이 분명하다. 나이는 좀 들었어도.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넌지시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한다. 정년 직후부터 망설였는데 실행을 하기까지 결국 6년이 필요했단다. 왜 한국말을 배우려고 하는지, 더구나 적지 않은 나이인데, 라고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했더니 대답이 너무나 평이하다.
한국말을 하고 싶어서란다. 며칠 전 저녁식사를 함께한 자리에서는 어학당의 같은 반 젊은 학생들에 비해 자신의 한국어 학습에 대한 목적의식, 동기 부여가 부족한 것 같다고 고백한다. 젊은이의 학습과 나이 든 이의 배움의 목표가 같을 수도 없고 뭔가를 성취하겠다는 목표지향성에서도 차이가 있을 것이니 당연한 게 아니겠냐고 거들었다.
사실 그에게는 한국 친구들과 자유롭게 한국어로 소통하고 싶다는 아주 중요한 목표가 있다. 일본에서 그가 섬기는 교회는 한국 교회와 자매관계를 맺은 지 올해로 33주년을 맞는다. 그는 자매관계를 위한 봉사에도 열심이었고 나름 한국어 공부에 힘을 쏟아왔지만 그의 한국어는 여전히 인사말 수준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노력한 덕분인지 이제는 곧잘 한국말로 말을 걸어온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4시간의 수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숙제에다 예습·복습까지 포함하면 입시생이 따로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반짝거리는 그의 얼굴 표정은 퍽 아름다워 보였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예상 수명이 늘면서 여생에 대한 고민들이 적지 않다. 65세 이상 인구비율인 고령화율이 지난해 23.1%로 세계 1위인 일본을 비롯, 고령화율은 11%에 불과하지만 고령화 속도는 일본을 웃도는 한국에서도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퇴직하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어쩌면 스가야씨의 예는 특별한 경우인지 모른다. 번듯한 직장에서 정년을 맞았으며 연금 등을 감안하면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이 없을 테고 게다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실행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모두가 스가야씨 같은 비전을 갖는 건 아니다. 아니 비전과 꿈이 있다 하더라도 실행하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유엔은 1991년 노인의 날을 맞아 ‘고령자를 위한 5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즉 자립, 참가, 케어, 자기실현, 존엄이다. 고령자들이 가치 있는 삶을 구가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고령자를 ‘피부양자’, 부담 주는 존재로만 인식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15∼64세 인구 6.6명이 고령자 1명을 부양했으나 2050년에는 1.4명이 1명을 부양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예측과 더불어 사회의 부양능력을 키워가려는 노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지만 고령자는 피부양자로만의 존재는 아니다.
고령자 가운데는 체력적으로 거동이 어려운 이도 있지만 인생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둔 지금은 건강하고 활동적인 고령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겐 평생 쌓아온 전문성, 높은 판단력, 강한 추진력 등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잘 모를 뿐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정부는 부양능력을 높이는 노력과 함께 노인과 퇴직자들의 꿈과 비전을 끌어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장르를 마련해야 한다. 꿈과 구상을 실현할 수 있는 예컨대 ‘고령자 꿈공장’ 같은 것을 사회적 기업으로 만들고 여기에 청년층이 취업하여 고령자들을 돕도록 한다면 청년실업 해소에도 도움이 될 터다. 우선은 스가야씨의 추진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조용래 카피리더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