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11) 2인의 스승, 신앙·삶의 멘토 역할
입력 2011-07-13 17:59
1997년 나는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에서 5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무릎관절 수술을 진행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정년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헝거포드 교수님은 참 정이 많은 분이었다. 동양에서 온 우리 가족을 무척 신경 써 주셨다.
“집으로 닥터 리를 초대하겠습니다. 가족들과 꼭 오세요.”
어느 주말 나와 아내, 두 아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교수님의 집으로 향했다. 대문까지 들어가는 데도 한참 걸리는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집이었다. 자택에는 낚시가 가능한 연못과 테니스장이 있었다. 저 멀리 숲길도 나 있었다.
‘세상에, 집이 얼마나 큰 거야.’ 그럴 만도 했다. 헝거포드 교수님은 당시 미국 정형외과 교과서를 집필한 학자였다. 특히 하우메디카라는 업체가 생산하는 인공관절을 개발한 분이었다. 전 세계에 공급된 인공관절 기구에 대한 로열티 5%만 해도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어서 오세요. 닥터 리. 잘 왔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의 자녀처럼 우리를 생각해 주셨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부활절마다 아내와 아이들을 초대해 주셨다. 식탁에 둘러앉아 손에 손을 잡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도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해 10월이 되니 한국에 IMF 구제금융이 시작될 것이란 소식이 날아왔다. 한국에서 준비한 돈은 집과 차를 구하는 데 대부분 써 버렸고 몇 푼 안 되는 돈마저 환율 때문에 반 토막이 났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장학금을 당겨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정말 미국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먼 이국땅에서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탱해 준 것은 헝거포드 교수님과 같은 인격적인 스승과 교회생활이었다. 토요일과 주일 우리 부부는 교회에 매달려 성경공부를 했다. 아내는 성가대 지휘자로 나섰다.
98년 3월부터 피츠버그의과대학 박사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획대로라면 피츠버그대에서 6개월을 마친 뒤 하버드의과대학 객원연구원으로 6개월을 있기로 돼 있었다. 피츠버그에선 생활비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허름한 아파트로 들어갔다.
나는 피츠버그대에서 내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인 후 박사를 만났다. 중국계 미국인인 후 박사는 나보다 15살 위였는데 십자인대 재건술과 연골재생술, 연골판 이식수술의 세계적 권위자였다. 후 박사는 수술 때마다 나를 찾았다. 내가 그분과 가까워진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눈에 콩깍지를 씌워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거물급 의사로 한국에서도 많이 시술하는 십자인대 수술법을 개발한 사람이었다. 매학기 세계에서 온 20명 이상의 교수들이 그의 수술을 참관하기 위해 다녀갈 정도였다. 후 박사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늘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수술 전 내가 보이지 않으면 나를 찾아 옆에 두고 수술을 진행했다. 어느덧 피츠버그대에서 6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닥터 리, 6개월간 더 있을 거죠?”
“박사님,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하버드의대로 가야 합니다.”
“좀 더 있는 건 어때요? 아예 내 밑에서 일하는 것도 좋고.”
“감사합니다. 박사님. 하지만 저는 연수를 빨리 마치고 한국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하버드의대의 루바시 교수에게 부탁을 하죠.”
“예?”
후 교수와 루바시 교수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정말 수화기를 들더니 루바시 교수에게 전화를 하는 게 아닌가.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