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충북 충주 연수동 주연옥 할머니
입력 2011-07-13 17:56
“한 가지 소원은… 통일되면 북한에 교회 세우는 것”
“할머니의 기도와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남편도 구원받고 하나님 앞으로 갔으니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충북 충주시 연수동 주연옥(76·충주제일교회 권사) 할머니는 용감한 결단 덕에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고 있다. 1·4 후퇴 당시 신앙생활을 핍박하는 공산정권을 피해 혈혈단신 남한행을 결정했던 것.
주 할머니는 월남 후 믿지 않는 남편을 만나 다시 핍박을 받았다. 중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남편은 주 할머니의 성령체험을 계기로 살아났다. 남편이 회심했다. 부부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성수를 했다. 마지막 가는 날 성경을 끌어안고 “하나님 사랑해. 사랑해” 하는 남편을 성경과 함께 보내주었다. 성령체험 후 자녀들도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로 자라주었다. 이제 주 할머니는 통일 후 북한 땅에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믿음의 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성장
평남 용강군 귀속면 속성리에서 1935년 태어났어요. 2남3녀의 맏이로 태어났을 때는 일제 치하였는데 잘 살았어요. 외가, 친가 다 교회 나가셨어요.
우리 친할머니가 박 권사님이었는데 이북에서 살 때 공산정권에서도 교회를 잘 다니셨어요. 산을 넘어 목림감리교회로 다니셨어요. 거기는 눈이 오면 치우질 못해요. 워낙 많아서. 앞사람이 들어갔다 나오면 다음 사람이 거길 들어갔다 나오고. 눈이 어른 허벅지를 넘어요. 그런데 살면서 우리 할머니가 나를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니셨어. 그렇게 따라다녔는데 믿음은 없었어. 할머니가 믿으니까 나도 믿어야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라다녔지. 뭐 일곱여덟 살인데. 뭘 알아요.
할머니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 “남의 거는 만지면 안 된다”였어요. 옛날에는 먹을 게 없으니까 남의 밭에 있는 옥수수대도 꺾어서 먹고 그랬어요. “할머니 나 저거 하나 꺾어 먹을까” 하고 물으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주인한데 물어야지”라고 교육을 시키시더라고요. 할머니하고 기도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외가에서 옷감 자투리 가져다 옷을 잘해 입혔어요. 어릴 때부터 옷을 잘 입었어요. 유똥(비단) 치마에 양단 저고리 이렇게 입고 가면 교회 애들이 둘러서서 “넌 어떻게 이렇게 옷을 잘 입냐. 이쁘다 이쁘다” 했어요. 학교 가도 그랬어요. 한복을 입고 다녔거든. 그땐 잘살았어요. 쌀도 다른 사람들 꿔주고 가을에 받고. 이 정도로 잘살았어요. 해방되고도 괜찮았어요.
믿는 사람들 핍박하는 공산당
공산정권이 들어와서는 믿는 사람들을 핍박해요. 죽이고 막 그래요. 그때부터 인민군들 눈치를 보았어요. 어느 주일날 꼭 교회에 가야 하는데 학교서 오래요. 안 가고 이튿날 학교 갔더니 나와서 자아비판하래. 어린 게 그게 싫어가지고 “아유 할머니 학교 가면 교회 가고 학교 안 왔다고 뭐라 그래.” “그럼 학교 가지 마.” 3, 4학년 돼서 그러니까 그게 싫어서 학교에 안 다녔어요.
전쟁나기 전에도 인민군 때문에 가정에서 예배 드렸어요. 교회에서 예배 못 드리게 해서 가정에서 드렸어요. 그것도 몰래 몰래 드리지, 알게 되면 붙잡아가요. 교회를 자기들이 사용하지도 않고 헐어요. 지붕이 함석으로 된 교회인데 없어졌어요. 아침나절 인민군들이 헐다가 이층도 아니고 단층인데도 두 명이 떨어져 즉사했어요. 빨간 흙으로 시신을 덮었는데 애들 때라도 보기 안 좋더라고요. 제단을 헐었는데 하나님이 그냥 두시겠어요?
우리 친구들, 교회 다니는 친구들이 주일날 학교 가서 중학교 댕기는데 그게 부러워서 자다가도 울고 그랬어요. 어린 마음에. 중학교엘 못 가서. 그래서 그게 한이 됐어요.
고향에 친구가 몇 명 있어요. 옛날에는 여자들 가르쳐야 연애질이나 한다고 안 보내요. 남자들이나 배워요. 그래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좀 많이 개방되셨던 거 같아. 교회를 다니시니까. 아버지는 날 가르치려고 몹시 애쓰셨어요. 근데 할머니는 주일날 오라는 거 싫어하셔서 학교는 안 가도 교회는 가야 된다 하니까. 난 할머니 편이거든.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할머니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하시거든. 그래도 아버지가 한번 그러더라고. “여식애라도 글을 배워야 된다. 내 이름자라도 배워야 되지. 왜 학교를 안 가냐.” “아버지, 학교 가면 막 뭐라 그래서 싫어.” “그래도 가야지” 하셨어요. 그래서 국문은 뗐어요.
혈혈단신 피란길에 올라
전쟁 나기 전 친척 집에 갔어요. 근데 그 집에 있을 때 전쟁이 났어요. 1·4후퇴 때 그 집에서 이남으로 간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밤에 간다고 해서 “나도 갈래요” 하니 “너는 엄마한테 가라” 그러더라고요. “엄마한테 안 갈래요. 나도 가고 싶어요” 했어요.
목림교회 목사님이 피란 갔다가 가끔 돌아오셔서 기다리면 국군이 들어온다고 기다리라고 했어요. 가정에서 예배 보면서 기다리는데 만날 이남 쪽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이남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이남이 믿음 생활도 자유롭고 배부르게 밥도 먹을 수 있고 여자들이 직장 생활 할 수도 있고. 이런 소리 해서 어린 마음에도 ‘저기 가야 산다’ 생각하고 무조건 따라온 거요. 어려도 엄청 약은 거죠. 아무것도 모르면 엄마 찾아가지 남을 따라오겠어요. 그 추운 날 슬리퍼 신고 오다 슬리퍼도 버리고 맨발로 왔어요. 섬으로 왔다가 배 타고 육지로 가는 건데. 밤에 조그만 배 타고 왔어요. 안 들켰어요. 목숨 내걸고 바다에서 죽더라도 나가야 된다는 욕심 가지고 나왔어요.
이북에서 나올 때 나이가 열여섯 살 정도. 초도로 나왔는데 교회에 나가겠다고 찾아갔어요. 기도하면서 울다가 오는 거요. 너무 부모님 생각이 나서. 속이 아파서. 울기도 엄청 많이 울었어요. 이산가족 찾기를 했는데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살아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얼른 통일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결혼
영종도에서 1년 동안 이북에서 나온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았어요. 거기서 밥해주고 밥 얻어먹고. 신랑을 만났어요. 군인이었어요. 나보다 일곱 살 많은 김찬기씨요. 자기 작은아버지 집에 나를 데려다 놨어요. 내가 착해 보이는지 동생처럼 예뻐해 줬어요.
열여덟에 결혼했어요. 한 고향에서 나왔으니까 불쌍하다고 결혼시키더라고요. 남편 이 전쟁 나가니까 따라 간다고 했더니 군대에 어떻게 가냐고 해서 거기서 시어머니랑 시누이랑 같이 살았어요. 진짜 어머니는 아니고 작은어머니를 시어머니로 모셨어요.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는 안 시켰는데 무당이요. 교회 가는 걸 싫어해요. 그래도 내가 이겼어요. 쫓겨나도 나는 교회는 가야 해요. 그분도 교회 다니다가 무당이 됐대요. 반대는 안 하는데 눈치를 주지.
한 번은 네 살 많은 시누이가 내가 50원을 훔쳐 교회에 갖다 바쳤다고 시어머니께 일렀어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신랑이 교회에 헌금하라고 50원씩 줘요. 거짓말을 하기 싫어 남편이 줘서 했다고 했어요. 나중엔 나를 쫓아내. 교회 다녀서 나 때문에 손님이 안 온다고. 따로 살았는데 지금은 조카들도 다 교회 댕겨요.
생사기로에 선 남편
남편은 젊었을 때 이발을 해봤대요. 군에서 그걸 했대요. 이발소하다 충주에 내려와서 충주비료공장 설비할 때 동업을 했는데 술을 좋아하고 회를 좋아해서 간디스토마에 걸렸어요. 간이 나쁘니까 황달이 되더라고요. 온몸이 새까매져요. 한 7년 앓았는데 그때는 수술도 없었어요. 의학이 잘 발달 안 됐었어. 약을 써도 안 듣고 하니까 사형선고 받고 죽는다고 시골에 혼자 들어갔어요. 충북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로. 1971년도에. 식구들한테 연락도 없이 혼자 간 거요. 개구리도 잡아먹고 물 갈아 먹고 한번 살아본다고. 혼자 들어갔는데 내가 찾아갔잖아요.
환자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막내아들하고 세 식구가 가흥에 가서 집을 하나 얻었더랬어요. 옛날 초가집. 집을 얻어 살림을 하는데 이 양반이 차차 더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구하는 거밖에 없다 싶어서 막내아들 데리고 가흥감리교회에 기도하러 다녔어요.
남편 구원
기도하고 오는데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 ‘내가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되지. 내가 열심을 내야지 안 되겠다’는 생각을 주시더라고요. 시골이라 목사님이 안 계신데 전도사님이 새로 오셨어요. 나더러 40일 철야기도하자고 하셨어요. 믿음이 없었는데 철야기도하다 3일 만에 성령님을 체험했어요. 그때 회개하고 성령 받고 찬송의 문 열리고 기도문 열리고 말문 열리고. 내가 내성적이었어요. 근데 성격도 바꿔주시더라고요. 내성적이라 말도 잘 안했어요. 초등학교 때도 하루에 말 세 마디 하면 많이 했다고 해요. 근데 성령님이 오신 다음에 우리 집사님들이 내가 왈가닥이 됐대요. 성령, 불덩어리가 오니까 막 기도하고 찬송했어요. 집사 직분 받고도 기도 못했는데 기도문이 그때 열렸어.
기도하는 거만 첫째지 가족은 생각지도 않았어. 옷 입고 자다가 눈만 뜨면 가는 거야. 교회 가서 철야는 못해. 남편이 무서워서. 남편이 못하게 하니까 교회도 안 다니고. 성령체험한 날 새벽에 가는데 남편이 막 욕을 해요. “니가 무슨 기도하러 가냐. 전도사한테 미쳐서 그러는 거지” 하고 핍박을 해요. 그래도 내가 참고 가서 하나님 앞에 더 땡깡(떼쓰기) 놨어. 하나님 저 양반 마음 안 돌이켜 주면 나는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겠노라고. 그날 새벽에 얼마나 울고불고 땡깡 놨는지. 그날 아침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어요.
기도하다 보니까 날이 환하게 샜어. 애 밥해줘야 되는데. 막 뛰어가다시피 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를 핍박하던 사람이 “교회 갔다 왔어?” 하고 아주 색시가 됐어. 성령님이 그렇게 해주셨더라고요. “교회 갔다 왔지요. 우리 믿는 사람은 기도가 목적인데 당신 위해서 나 기도하러 다니는 거예요. 빨리 하나님 앞에 돌아오셔야지요.” 그랬더니 “그래 맞아.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서 밥도 하지 말래. 내 얘기를 들어보래요. “내가 잘못했는데 앞으로는 내가 잘못하면 자네가 이해하고 자네가 잘못하면 내가 이해하고. 나도 여생을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 병든 사람이 그래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기뻐요. 그래서 내가 붙들고 울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며 찬송했어요. 그러니 좋아하더라고요. 금요일인데 “나 이번 주부터 교회 나갈 거야.” 그러잖아. 승리했잖아요. 남편이 그때부터 교회 나와서 10년을 하나님께서 연장시켜주셨어요. 병원에서도 죽는다 그랬어요. 그래서 병원에 오지도 말라고 그랬었어요. 그 양반 구원시켜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돌아가실 때도 나 많이 안 울었어요. 감사 예배드리고. 돌아가셨는데 3일장을 해야 하는데 그날이 주일이네. 우리 애들 다 내려왔어요. “아버진 천국 가셨다. 너희들 걱정 말고 울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게 목적이다.” 그리고 교회로 다 데리고 갔어요. 육신이 죽었지 영혼은 안 죽었잖아요. 천국 간 게 너무 기뻐서. 너희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라고. 예배드리고 와서 오후 2시에 교회식으로 치렀어요. 우리 아이들도 다 신앙생활 잘하고. 할머니가 기도해주셔서 내가 여기 이렇게 왔고, 신앙생활 한 것도 할머니 기도, 은혜지요. 할머니에게 하나님을 연결시켜 주셔서 항상 감사해요.
주신 분도 키우신 분도 모두 하나님
자녀는 3남2녀 낳았어요. ‘속 바꿔서’ 아들 딸 아들 딸 아들 낳았어요. 5남매 낳고 가족계획해서 더 안 낳았어요. 많이 낳으면 서로 고생이라고.
내가 은혜 받고 나서 아이들도 달라지더라고요. 사람들이 보고 저기 효자 올라간다 효자 올라간다 할 정도로 착해졌어요. 난 그때 자식도 하나님이 주셨지만 키우는 것도 하나님이 키우셔야 한다는 걸 확실히 알았어요. 5남매가 다 속 안 썩이고 잘 커줬어요.
애들이 다 착하고 믿음 생활 잘하고. 우리 아이들한테는 어려서부터 주일은 하나님 날이니까 교회는 가야 된다. 십일조 생활 지금도 다들 잘해요. 시집 장가가는 것을 신경 안 썼어. 며느리들도 다 착하고 잘해요. 장로, 권사님 딸들이에요. 내가 중신했어요.
아이들을 위해 평소에 “항상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게 해 달라, 착하게 베풀고 살게 해 달라. 형제 간에 우애 있게 해 달라.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요.
통일되면 북한에 교회 세우고파
남편 돌아가시고 서울로 갔어요. 서울 살 때 막내아들이 10만원씩 주고 가더라고. 그걸로 청약적금 들어 10년 넘게 부어 이리 당첨 됐어요. 며느리들이 맞벌이를 해서 손자 손녀 봐주느라 충주에 살고 있었거든. 첫째 둘째는 서울에 살고 셋째 넷째 다섯째는 충주에 살아요.
서울에서는 순복음교회 다녔는데 한 집에서 두 교회 다니면 보기 안 좋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다니는 충주제일교회로 옮겼어요. 손자 손녀 보는 동안 아파트는 전세 놨어요. 아이들 다 커서 이리 이사 온 지 5년 됐어요. 손자 손녀 같이 살 때도 좋았는데 지금 혼자 사니까 행복해요. 시간도 많지 성경 보지 기도하지 하나님하고 얘기하는 거야. 애들 위해 새벽기도 가서 기도해주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걱정거리가 없어서 더 좋아요. 며느리 아들이 못해서가 아니라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들대로 살면 저희도 좋고 나도 좋고. 여행도 다니고 교회 봉사도 하고. 교회에서 김장 봉사를 하거나 노인대학 식사 설거지도 해주고. 건강해서 약 안 먹고 병원에 안 다니니까 다 부러워해요. 노인대학에서 달음질하면 내가 일등이야. 하나님 은혜야.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교회 세우는 거예요.
■ 연보
1935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2남3녀의 맏이로 출생
1942년 목림감리교회 출석
1951년 초도로 피란. 초도교회 출석
1952년 영종도로 이주. 영종도감리교회 출석
1953년 김찬기(당시 25세)씨와 결혼
1955년 큰아들 출생
1959년 둘째 딸 출생
1960년 셋째 아들 출생
1962년 넷째 딸 출생
1967년 충북 충주시로 이사. 탄금감리교회 출석
1967년 다섯째 아들 출생
1971년 충주시 가흥리로 이사. 가흥감리교회 출석
1983년 남편 별세. 서울로 이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출석
1998년 충주시로 이사. 충주제일교회 출석
2006년 현 자택으로 이사
■ 충주제일교회
1905년 충북 충주시 성서동 초가 8간에서 김정현 전도사가 3명의 교인으로 교회를 개척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으로 1907년부터 충주읍교회로 불리다 58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93년 11월 현재 위치에 지하 2층, 지상 3층 교회를 짓고 입당 감사예배를 드렸다. 1978년 소화춘 목사가 부임, 2011년 5월 은퇴했다. 영성과 지성, 의지가 조화를 이룬 충주의 중심 교회로서 생명사랑, 영혼구원을 위해 전 교인이 말씀과 기도의 능력으로 날마다 성장하는 교회를 만드는 게 설립 목적이다. 부설시설로 제일기도원, 제일묘원이 있다. 2001년부터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충주제일노인대학을, 2003년 아버지학교를 개설했다. 재적교인 1500명, 출석교인 1000여명. 충북 충주시 연수동 1303번지(043-843-3233).
충주=정리 최영경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