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10) 美 최고 병원 출근 첫 날부터 수술실로
입력 2011-07-12 17:24
1996년 2월 말. 드디어 우리 네 식구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곳으로 가는구나. 이제 몇 년 후면 모든 학업을 끝내고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 한양대병원과 제천서울병원에서 바쁘게 지냈던 세월이 생각났다. 엄마 곁을 떠난 아기처럼 두려움이 앞섰지만 환자를 책임져야 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현지 한기덕 집사님 내외분은 처음 만난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자동차 운전면허부터 집 전화까지 세밀한 부분도 가족 일처럼 챙겨주셨다. 우선 월세 반지하 아파트부터 얻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3월 1일 미국 볼티모어시 존스홉킨스대학병원으로 출근했다. 병원 정문에는 ‘전미 대학병원 평가에서 금년에도 1위가 됐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7년째 관절수술 분야에서 1위를 달리는 명망 있는 병원이었다.
나의 지도교수가 되신 헝거포드 박사님은 60대 중반의 독일계 미국인으로 당시 인공관절 분야의 ‘원조’라 불리던 분이다. 키가 185㎝는 족히 될 박사님은 전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4가지 인공관절 기구 중 하나를 디자인한 분이셨다. 개발자이자 독창적 시술 방법을 만든 분이었기에 환자들이 첫 수술뿐 아니라 재수술까지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마치 포드자동차 운전자가 자동차의 문제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포드에게 자동차 수리를 맡기듯.
“잘 오셨소. 닥터 리.”
“서신으로 인사드렸던 이창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손을 닦고 들어오시오.”
첫날 가자마자 교수님은 나에게 수술실로 손을 닦고 들어오라고 하셨다. 의료계에서 “손을 닦고 들어오라”는 말은 의술을 전수해 주겠다는 뜻이자 환자를 같이 돌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계셨던 모 대학 교수님이 수술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헝거포드 교수님께 강력하게 요청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수술 보조를 시켜보니 그 한국인 교수님이 잘하셨던 것 같다. 헝거포드 교수님은 그때부터 한국인 의사의 손재주가 꽤 좋다고 판단을 하셨고 곧이어 도착한 나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나는 존스홉킨스대학병원의 성인재건수술 및 무혈성괴사 센터의 책임자였던 박사님의 어시스트로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릎관절 수술을 진행했다. 교수님은 여러 개의 수술실을 다니며 하루 평균 2시간 인공관절 수술 4건 정도를 진행했는데 펠로들에게는 환자 무릎의 수술 부위를 열게 했다. 그리고 뼈를 자르는 중요한 수술부터 본인이 직접 맡으셨다. 재수술은 첫 번째 수술과 달리 4∼5시간이상 걸리는 고난도 수술이었다.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의사들은 우주복처럼 생긴 특수 수술복을 입고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복잡한 수술을 진행했다.
신앙심이 좋으셨던 헝거포드 교수님은 매일 오전 6시15분만 되면 젊은이들을 모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교재로 대화를 나누면서 2개월 코스로 젊은 레지던트의 소양을 키우셨다. 그들은 미국 전역에서 모인 수재들로 모두가 의대를 A+의 성적으로 졸업한 명문가 자녀들이었다. 이들은 관대한 성격에 남을 배려하는 기품이 몸에 배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레지던트들도 세계 최고의 교수님 밑에서 몇 달 훈련받으니 정말 탁월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학식은 물론이고 수술에도 능숙해졌다. ‘나도 저 교수님처럼 누군가에게 훌륭한 멘토이자 스승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