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 (106)
입력 2011-07-11 16:20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
예배당 주변에 귀때기 땅 몇 평이 있다. 지난 가을에는 튼실한 배추 400여 포기를 수확했으니 아주 작다고는 볼 수 없다. 어느 해에는 청년들이 밭을 경작하고, 또 어느 해에는 여선교회가 농작물을 심고 가꾼다. 고추도 심어보고, 깨도 심고, 고구마며 옥수수도 심는다. 가급적이면 2모종 수확을 한다. 봄에 강냉이 심어 여름에 따 먹고, 장마 지고 나면 김장용 채소를 심어 김치를 담그는 식이다. 요즘은 들깨 모를 심는 철이다. 물론 기대한 것만큼 농작물이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다. 생전 처음 강냉이 씨앗을 땅에 심고, 새싹이 자라는 걸 본 이들도 있으니 어찌 이들의 손에서 농작물이 잘 자라길 바랄까?
웬만하면 밭을 없애고 주차장으로 쓸 수 있겠지만, 벌써 십수 년째 ‘경작용 토지’로 구분지어 놓고 있다. 농사란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에서다. 요즘처럼 옥수수 대궁이 굵어지고 붉은 수염이 돋을 즈음엔, 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삶은 옥수수를 기다리는 나날도 즐겁기만 하다. 금년 봄에 옥수수 씨앗은 김 목사가 넣었다. 생전 처음 해 본 거란다. 옥수수 싹이 땅에서 올라오던 어느 날 아침, 출근하면서 항상 귀때기 밭을 거쳐 사무실로 들어서던 그는 탄성을 질렀다. “목사님, 제가 심은 옥수수가 싹을 냈어요!” 마치 그 자신이 대지를 뚫고 올라온 옥수수의 새싹인 양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봄이 익어갈수록 가뭄도 깊어졌다. 예쁘게만 보이던 옥수수 새싹은 비실비실 말라갔고, 우물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물 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씨앗을 심은 김 목사가 몸이 달아 물을 퍼다 밭에 뿌리잔다.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밭이 물에서 멀리 있어서도 그렇지만, 봄에 밭을 일굴 때 [이랑]과 [고랑]을 정확하게 만들지 않은 까닭이다.
농사를 지어 보지 않은 이들은 [이랑]이 뭐고 [고랑]이 뭔가 하겠지만, 혹시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하겠지만, 아니다. [이랑]과 [고랑]은 ‘어처구니’의 ‘어처’와 ‘구니’처럼 서로 다른 형상을 이르는 말이다. 농사짓는 솜씨가 달라지고 농사마저 사라질 지경이 되니까 농사에 딸린 말도 더불어 사라졌다. 극정이, 쟁기, 써레, 곰배…. 이러면 누가 이 말들을 알아들을까?
밭농사는 반드시 [고랑]과 [이랑]을 만들어야 한다. 흙을 갈아엎어서 흙을 보드랍게 한 후에 [고랑]에서 퍼 올린 흙으로 [이랑]을 만들어 씨앗을 넣거나 모종을 옮겨 심는 것이다. 그러니까 밭에 심는 모든 것은 [이랑]에 심는 것이다. 그냥 [밭]에 씨앗을 심는 게 아니라, 밭 [이랑]에 심는 것이다. [고랑]은 그럼 뭘 하는가? 제 흙을 이랑에 넘겨주고 스스로 낮아져 이랑의 남새와 곡식을 자라게 하는 바람, 공기, 물 같은 것들을 담거나 내 보내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곡식을 심기는 [이랑]에 심고, 키우기는 [고랑]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예배당 귀때기 밭은 봄에 삽으로 굳은 땅을 일굴 때 힘들다고 이랑을 높이고 고랑을 깊게 하지 않았다. 그냥 흙을 파헤쳐서 씨를 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이 고일 [고랑]이 없으니 물을 퍼다 밭에 쏟는다 해도 물이 담길 수 없는 것이다. 여러 날 장맛비가 내렸는데도 금년에 김 목사가 심은 옥수수는 맛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고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삶에서 고난을 밭의 [고랑]과 같다고 할 때,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