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학자들이 읽고 재해석 중국책, 우리 思想史의 일부로 연구해야”
입력 2011-07-11 21:17
宋·元·明代 중국의 책 문화사 ‘서림청화’ 번역
고문헌 전문가 박철상씨
고서(古書) 읽는 은행원, 혹은 경제도 아는 고문헌 전문가?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었다. 달러니 유로화니 화폐 단위들과 씨름하다 퇴근한 저녁이면 광주은행 박철상(45) 외환영업부 부부장은 1∼2시간쯤 ‘모드 전환기’를 갖는다. 컴퓨터와 외환에서 초서(草書)와 고문서의 세계로. 그가 고문헌 연구가로 살 수 있는 건 하루 3∼4시간에 불과하다.
교수나 연구원 명함은 없지만 박씨는 이미 이름 난 학자다. 그를 학계 스타로 만든 건 2002년 ‘문헌과 해석’ 겨울호. 베스트셀러 저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완당평전’에 숨은 200곳 오류를 지적했는데 이게 학계와 출판계 양쪽에서 대단한 파장을 낳았다. 지난해 낸 ‘세한도’는 그가 보유한 수천 점 고문서의 위력, 1차 사료라는 범접 못할 ‘팩트’의 힘이 빛난 책이었다.
박씨가 최근 중국 판본학 분야의 고전인 ‘서림청화’를 번역했다. 청 말기 학자 섭덕휘(1864∼1927)가 1911년 저술하고 6년 뒤 출판한 ‘서림청화’는 중국 고대 서적 출판에 관한 전문지식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판본학 저서이다. 송·원·명대 중국 출판에 대해 중국인이 정리한 책이니 ‘중국 책에 대한 중국 책’인 셈이다.
‘중국 책에 대한 중국 책’ 그걸 왜 알아야 해?
한·중·일 3국 중 ‘서림청화’를 번역한 건 박씨가 처음이다. 정작 중국에서는 현대 한어로 소개되지 않았다. 번역 좋아한다는 일본에서도 이 책만은 번역서가 나온 적이 없다. 까다로운 내용 때문이다. 책에 대한 책인 ‘서림청화’는 온갖 서적과 그 책의 수십 가지 판본들이 복잡하게 얽혀 서지학에 대한 깊은 지식 없이는 오류를 내기 쉬웠다. 물론 독자가 많은 대중서도 아니다. 중국 사람도 번역하지 않은 중국의 출판 이야기. 도대체 왜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걸까.
박씨는 ‘서림청화’을 통해 ‘우리 책’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 그는 중국 고서가 일본이나 서양고서와는 달리 중국 책인 동시에 우리 책이라고 말한다. 우리 출판의 저본이 되고, 국내 출판기반이 무너진 임진왜란 이후에는 출판 공백을 메워준 게 중국 책이었다. 우리 지식인이 읽고 소비하고 재해석하면서 우리 지성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면 가치는 재평가돼야 한다. 우리 땅에서 찍은 것만 연구하겠다는 국내 문헌학의 좁은 시야를 지적한 것이다.
“중국에서 수입한 책도 조선에 오면 표지가 우리 스타일로 바뀝니다. 표식이 붙는 거죠. 여기에 조선 학자가 장서인(소장자를 표시한 일종의 도장)을 찍고, 여백에 주석을 달고, 감상을 글로 남깁니다. 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받아요. 그렇다면 이 책은 이미 우리 사상사의 일부예요. 국내에서 찍은 ‘논어’는 우리 책이니까 연구하고, 조선 학자가 주석 달면서 읽은 책은 중국 책이니까 논할 가치가 없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명과 청대 화가들의 평전 모음집 ‘국조화징록(國朝畵徵錄)’도 사례로 들었다. 추사 김정희가 소장한 책으로 책에는 추사 인장이 수십 번 찍혀 있다. 추사의 화론(畵論)에 남긴 흔적도 크다. 당연히 연구 대상이 돼야 한다.
박씨는 해외 문화재 환수에 대해서도 다른 얘길 했다. 가져오는 것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왜 가져오는가. “2006년 도쿄대가 서울대에 기증형식으로 반환한 조선왕조실록은 전시 한번 하고 서고에 들어간 뒤로 끝이잖아요. 이미 국내에 다 있는 책인데 번역할 것도 없고. 그걸 찾아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간서치(看書癡·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의 이중생활
박씨가 2002년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를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에 놀랐다. 은행원의 놀라운 한문 실력과 그가 보유한 방대한 자료.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7년간 서울에서, 다시 4년째 광주에서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가 한자를 ‘배운’ 건 중고교 6년이 전부다. 한번도 따로 한문 공부라는 걸 해본 적 없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사서(四書·‘대학’ ‘논어’ ‘맹자’ ‘중용’)를, 대학 때는 개인문집을 취미로 읽었다.
그에게 한문은 일상이었다. 전주의 한학자였던 아버지는 늘 무언가를 한문으로 읽고 썼다. 집에는 갓 쓴 한학자들이 드나들었다. “제게 (한문은) 딱히 무릎 꿇고 암송하거나 배워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었어요. 어떤 책을 떼야한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고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저절로 한문을 읽을 수 있게 됐어요.”
조선 주역사를 정리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운 10대 후반. 고서점가를 돌아다닌 게 고문헌 수집의 시작이 됐다. 호기심에 한두 권씩 모으던 고서는 직장을 잡은 뒤 제법 규모가 커졌고 이제는 수천 권 장서로 불어났다. 자료는 학계 최고 지성과 인연을 맺어줬다. 그가 첫 글을 발표한 ‘문헌과 해석’은 안대회(성균관대), 정민(한양대), 이종묵(서울대) 교수 등 스타급 학자들이 모여 만든 계간지. 안대회 교수가 쓴 ‘시법원류(詩法源流)’ 관련 글을 보고 연락해 친분을 맺었다. 박씨는 마침 조선 중종 때 간행된 목활자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유일본이었다.
고서를 모으다보면 첫사랑처럼 엇갈리는 인연도 만난다. “15년쯤 전에 (서울) 청계천에 필사본 50권이 나왔는데 전부 추사 관련인 거예요. 꼭 사고 싶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 포기했죠. 며칠 뒤 마음이 바뀌어 가보니 위탁했던 주인이 찾아갔대요. 그 뒤로 그 책을 다시 못 봤어요.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영원히 떠난 거예요. 한번 누군가의 컬렉션에 들어가 버리면 영영 못 보기도 하는 거죠.” 그때 놓친 게 추사가 읽던 책들을 베낀 일종의 추사 독서목록. 책과 함께 추사의 사상과 화풍을 이해할 기회도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물론 운이 좋았던 적도 많았다. 추사의 ‘해동비고(海東碑攷·한국 고비문 7점 원문을 적고 분석한 논문집)’ 필사본은 서울 인사동에 나갔다가 우연히 만났다. “잘 다니던 가게(고서점)에 들렀다가 구한 거예요. 고서라는 게 그래요. 간발의 차이로 만나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고.”
박씨는 자신의 컬렉션이 “학문적으로는 중요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생각보다 가치가 높지 않은 책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도난 걱정은 별로 없다.
“제가 가진 건 김민영 부산저축은행장이 가지고 있었다는 그런 고가 책이 아니에요. 몇십만원, 비싼 게 몇백만원이에요. 그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제게는 아주 중요하지만 말이에요. 혹시 훔쳐가서 팔아봐야 다시 저한테 올 거예요. 학계에서는 알려진 책들이라서 달리 처분 할 수가 없거든요(웃음).”
밖에 있어서 자유로운
그는 비제도권 학자이다. 하지만 어느 학자보다 활발하게 학술지에 논문을 내고 토론자로 나서고 심사도 한다. 길이 제도권 안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은 외부 전문가라고 막아놓은 장벽 같은 건 없어요. 제도권 밖의 학자도 공론의 장에 주장을 발표하고 논쟁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고 거쳐야 해요. (제도권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결국 학문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학계거든요.”
학위가 없어 자유로운 점이 있긴 하다. 박씨는 초서를 읽고, 장서인으로 문헌 가치를 파악할 줄 알고, 금석학을 탐구한다. 이 모든 게 별개의 전공분야. 학교에서 배웠다면 이 중 하나를 택해야 했겠지만 그에게는 대학이 쳐놓은 ‘벽’이 없다. 마음가는대로 공부하고 떠오르는 대로 썼다. 지금 박씨가 고문헌 분야의 ‘르네상스 맨’이 된 건 그가 학문분과의 벽 너머에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제 원문 독해 능력이 좋다고 하지만 사실 아주 뛰어난 건 아니에요. 다양한 분야를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일 뿐이에요. 인장을 본다든지, 초서를 읽는다든지, 문헌을 파악한다든지 그런 거. 5명의 학자가 모여야 할 수 있는 일을 저는 혼자 할 수 있어요. 그게 제 장점이겠죠.”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