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세원] 반드시 오리라

입력 2011-07-10 18:02


지난주에 아버지의 추도식이 있었다. 개성이 고향인 아버지는 늘 그 땅을 그리워했지만 결국 밟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몇 해 전 아직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때에 나는 개성시범관광단의 일원으로 동생과 함께 난생 처음 개성을 방문했다. 부모님의 사진을 품고 닫혀버린 반쪽 땅을 향해 발걸음을 떼는데 아버지 생각에 가슴 뭉클하니 뜨거운 눈물이 먼저 솟았다.

개성에서 청년기까지 보내고 직장 때문에 서울로 왔다가 전쟁 통에 부모와 고향과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 파주에서 30분이면 도착한다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그 땅을 수십 년 동안 단 한번도 밟아보지 못하고 그리운 부모형제 생각에 피눈물을 흘리신 고통의 세월을 누가 보상해 줄 수 있겠는가. 일행 가운데 50여년 만에 고향땅을 밟는다는 할아버지를 뵈니 아버지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비록 하루 일정이지만 이렇게라도 다녀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개성과의 첫 만남은 송도 3절의 하나인 박연폭포였다. 웅장하지는 않으나 화강암 절벽 위에서 하얀 비단을 수직으로 떨어뜨린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황진이의 가야금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릴 것만 같은 정취가 있는 곳이었다. 고려왕조 충절의 표상인 정몽주의 넋이 선명한 피로 물든 비극의 역사적 현장 선죽교에는 무성한 고목만이 오래된 유적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개성 곳곳을 버스로 돌면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본 현실에 마음이 아렸다. 아버지의 고향이라 내겐 남다른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북한 제2의 도시라는 개성은 무채색을 띤 영화의 세트장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나 마무리가 덜 된 듯 외관이 거칠어 보이는 아파트와 허름한 주택, 한적한 도로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 다니는 많지 않은 사람들.

내 눈에만 그리 비쳤던 것일까. 농촌 풍경에서도 가난이 흘렀다. 온통 민둥산에 옥수수와 감자밭만 보이고 어쩌다 보이는 누렁이 황소도 마른 모습이었다. 비슷한 모양을 한 작은 농촌 주택들이 모여 있었지만 골목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왕건과 최영 장군의 기개가 있고, 정몽주의 혼과 황진이의 시가 살아 숨쉬는 역사도시 개성은 어디로 갔는지 회색빛으로 뿌연 그곳에서 난 생명력을 느낄 수 없었다. 우리의 반쪽을 위해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할 때 마치 공항에서 여권 검사하듯 해서 기분이 씁쓸하기도 했지만 분명한 건 출입국사무소가 아닌 출입사무소를 거쳤다. 우리는 분단된 국가의 한 민족인 것이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국회에서 올림픽정신에 부합하는 평화올림픽이 될 수 있도록 남북한 단일팀 구성 및 공동훈련 기반 조성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나아가야 할 분명한 한 민족인 것이다. 멀고 험난해 보일지라도 평화통일의 그 날은 반드시 오지 않겠는가.

김세원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