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8) 의료선교 위해 인공관절 전문가 되기로
입력 2011-07-10 18:16
나는 1987년부터 90년까지 적십자사 병원선을 타고 인천 앞바다 섬을 다녔다. 88년 결혼과 동시에 우리는 인천 부모님 댁으로 들어갔다. 당시 공중보건의는 박봉이었다. 장인어른은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 목회자였지만 자식에게 생활비를 대주시는 분이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 역시 평생 가난한 사람을 의술로 돌봤기 때문에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대학 4학년 때 전국교회음악회 총학생회장까지 지낸 아내는 88년 졸업 후 서울신대 음악대학원에 진학한 동시에 대학 강의도 맡았다. 아내는 2년간 시집살이를 군말 없이 잘해주었다. 89년 장남 상열이가 출생했고, 91년 상훈이가 태어났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한양대 의대 정형외과 레지던트 시절 술을 거부해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100일 당직 때는 양말을 갈아 신지 못해 발바닥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아내는 밤에 갈아입을 옷과 먹을 것을 싸와 병원 근처에서 무선호출을 했다. 가족을 만나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으앙∼” 작은아들이 나를 보고 울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빠라고 하는 사람이 몇 개월 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쳤으니 낯선 게 당연했다. ‘아내나 아이들에게 참 중요한 시기인데 도움이 안 되는 이런 삶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감도 밀려왔다. 의자 몇 개 붙여 쪽잠을 자던 시기를 지나 병원 침대에 잘 때쯤 고달픈 레지던트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91년 정형외과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잠깐 시간을 내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앞으로 내가 어떤 분야에서 일할 것인지 한국보다 앞선 미국 의료 현장을 보고 싶었다. 마침 현지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활동하시는 재미교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제 꿈은 의료선교입니다. 병원을 세우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선교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선교 마인드를 갖고 있는 의사, 간호사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의료선교도 나갈 계획입니다. 아무래도 선교현지에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많으니 소아정형외과를 지원해볼 생각입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자네 뜻은 잘 알겠네. 하지만 내 생각엔 노인정형외과가 나을 것 같네. 한국은 앞으로 미국처럼 아이를 많이 낳지 않을 거야. 반면 고령화에 맞춰 노인들은 점차 늘어날 거고. 실제로 미국에선 노인정형외과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다네.”
“노인 분들은 수술 위험부담이 크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한국의 장래를 보고 싶은가. 그럼 미국을 보게. 선교 사업을 하려는 자네 뜻은 좋아. 하지만 선교를 하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해. 소아정형외과를 전공해선 돈을 벌기 힘들어. 노인정형외과 중 인공관절을 전문으로 해보게.”
당시 인공관절은 미국에서 연수를 받았던 의대 교수님들이 새로운 수술법이라며 국내에 도입, 늘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날로 나는 20년 대선배의 말씀에 따라 인공관절 수술의 대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최적의 장소에서 최고의 사람을 붙여주셨다. 최일룡 교수 등 한양대 의대 교수님들이 그랬다. 최 교수님은 당시 인공관절 수술의 대가로 대한정형외과학회장과 한양대 부총장까지 지낸 명의셨다. 교수님은 직접 나를 지도하시며 세심하게 가르쳐 주셨다.
“미국에 가기 전 한 해 동안 제천에 가서 근무하게.” 96년 2월 레지턴트 생활을 마친 뒤 곧바로 미국 유학을 꿈꾸던 나에게 교수님들은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하늘같은 분들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