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버려지는 제품같은 청춘이여… 1980년대생 ‘한국문단의 뉴 키즈’ 소설·시집 펴내
입력 2011-07-08 17:42
1980년대 생인 한국문단의 뉴 키즈. 두 청년이 각각 첫 시집과 첫 소설을 냈다. 둘은 대학졸업 후 짧지 않은 백수생활을 했다. 그 경험은 그들에게 일종의 축복이었다. 한 사람은 문학적 좌표를 발견했고 한 사람은 그 경험을 소설로 썼다. 펜 끝이 촉촉하게 살아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철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1년 가까이 놀고 있다. 1년이면 88만원 세대들의 평균 백수 생활보다는 짧지만 여하튼 철수와 그 친구들은 인턴기간을 채우자마자 회사에서 쫓겨난다. “신제품 체험 사용 기간 동안 써보니 별로다”라는 게 이유다.
그들에게 면접은 일종의 성능 테스트다. “주량은?” “만약 경쟁회사에서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한다면?” “노래 실력은?” 제품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해 의심으로 끝나는 면접이라니. 제품이 선택되기 위해서 갖춰야할 조건은 무엇인가.
2011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철수 사용 설명서’(민음사)에 등장하는 ‘철수’는 수상작가인 전석순(29)과 같은 또래인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붙여진 보통명사다. 명지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백수 생활을 거쳐 200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전석순은 소설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청년들을 ‘불량품’ 혹은 ‘루저’로 만들어버리는 한국 사회의 모순적 현실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곳곳에 배치된 ‘상품 Q&A’는 기발하다.
Q=철수가 혹시 성욕이 없는 건 아니죠? 아니, 어떻게 만난 지 100일이 지났는데 손 한번 한 잡을 수가 있어요? 이거 반품 사유 되죠? 빠른 답변 부탁드립니다.
A=고객님, 사용자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철수는 섹스가 가능한 모델입니다. 진도가 더딜 경우, 먼저 손을 잡아 주면 진행 속도가 다른 모델과 비슷해진다는 점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설은 주인공 ‘철수’의 제품 규격과 사양 설명에서부터 제품 보증서에 이르기까지 설치 방법, 전원 공급, 청소 방법, 주의 사항, 알아 두기, 제품 Q&A 등 가전제품 사용설명서의 양식을 고스란히 차용하여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
알아두기=간혹 처음에 성능이 좋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성능도 시원찮고, 자꾸 보니 디자인도 별로라 반품이나 애프터서비스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제품 자체의 변질이라기보다 사용자의 변심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
전석순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가 소설의 사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새로운 소설 활용법을 개발한 이 도발적인 신예에게 ‘소설가 보증서’를 발급한다”(문학평론가 김미현)라는 심사위원의 코멘트가 이를 말해 준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한 마디로 ‘철수’를 사용하는 ‘설명서’에 관한 이야기이다. 철수는 철수니까 철수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원인이 철수에게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는 문제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짧은 연애기간도, 재능이 없다면 두어 달만 다니고 그만두었던 피아노 학원도, 알고 보니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애구나 하면서 끝났던 우정도, 모두 철수의 잘못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제품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의 부주의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57쪽)
소설은 효능과 효율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을 가전제품으로 취급하여 규격화된 성능과 양식을 요구하는 사회, 우리 주변의 절대다수인 철수를 사용연한이 임박한 구형 전자제품으로 취급하는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불량품이 아닌 정상제품이 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사용설명서를 거의 완성했을 즈음, 철수는 깨닫는다.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제품은 애초에 없었으며 그건 철수도, 철수를 사용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사실 모두가 비정상이니 결국 모두가 정상인 셈이라고.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 모두 철수라는 이름의 사용설명서를 가진 또 하나의 가전제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전석순은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최고의 제품이라고,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불량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사실 나는 불량이거나 반품으로 들어온 것일 수도 있음을. 어쩌면 이 고백이 내가 업그레이드되어 생긴 새로운 기능이 될 지도 모르겠다.”(225쪽)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