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은영] 나는 반 잔이다
입력 2011-07-07 17:59
누가 마시다 갔나?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식탁에 물컵이 놓여 있다. 요즘 자주 깜박해서 어제 내가 마시다 둔 건지, 딸이 출근하면서 마시다 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컵을 들고 카네이션 화분으로 갔다.
딸이 어버이날에 “이 꽃은 꼭 살려야 돼! 엄마 사랑을 확인할 거야”라며 협박 반 애교 반을 섞어 건네 준 화분이다. ‘이 화초는 죽이면 안 되는데….’ 부엌 창가에 놓아두고 나 역시 부담 반 애정 반의 감정으로 물을 주곤 했다. 그런데 잎만 남은 카네이션이 좀처럼 싱싱해질 기미가 안 보여 애가 탄다.
‘좀 쌩쌩해지면 안 되겠니?’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물컵을 기울였다. 부엌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장맛비에 씻겨 더 투명해진 아침 햇살이 컵에 쨍 부딪혔다. 순간 죽비에 맞은 듯 컵의 물이 딱 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나는 반 잔이다’라고 외치는 듯했다. 참 절묘하게 남았네! 이건 반이나 있는 걸까? 반밖에 없는 걸까? 어리석은 의문이 들었다.
반은 참 묘한 말이다. 낙관과 비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올림 할 땐 하나로 쳐주고, 내림 할 땐 0처럼 취급한다. 절반의 성공이라고도 하고, 절반의 실패라고도 한다.
주식이 반토막났다며 한숨 쉬고, 반이나마 건졌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런데 반일층이란 말은 없고 반지하란 말은 있다. 반만 일층이란 말보다 반만 지하라는 말이 더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학창시절,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아 코 빠트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해 준 말이 있다. “물 반 잔을 보고 어떤 이는 반이나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반밖에 없다고 하지. 반이나 있다고 한 이는 힘을 내서 나머지를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반밖에 없다고 한 이는 포기하기 쉽다. 입시를 앞둔 너희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해야겠니?”
똑같은 상황도 마음에 따라 희망과 절망으로 달라진다는 말이었다. 내가 가끔 우리 아이들이 코 빠트리고 있을 때 써 먹는 말이기도 하다.
반은 분명히 ‘무’가 아니라 ‘유’다. 물 한 방울에도 목을 축일 수 있는 생명이 있으니, 물 반 잔은 목마른 이의 목을 충분히 축여줄 수 있는 양이다. 그런데 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거 같다. 가득 찬 것에 비교하면 내가 가진 반은 초라하게 보일 테니까.
‘술은 채워야 맛이고 임은 품어야 맛’이라는 말이 있다. 꽉 찼다는 것은 그만큼 충만함을 느끼게 해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더 채울 게 없는 상태다. 반면에 반 잔은 더 채우면 한 잔이 된다는 희망이 있다.
옛 대중가요 제목처럼 ‘아니 벌써!’ 7월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벌써 한 해의 반이 지났다. 아니 아직 노력해서 채워나갈 반이나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반이란 말은 겸손한 말이기도 하다. 차곡차곡 담아나가는 노력을 해야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더 알차고 치밀하게 채워갈 반년이나 남은 지금 이 순간, 나는 반 잔이다.
오은영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