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채용공고에 ‘4년제 대졸’ 지우자
입력 2011-07-07 18:00
대학의 미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주 빠지는 것이 고졸 이야기다. 고졸이 안고 있는 문제를 간과하면 어떠한 교육 해법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약하지만 한이 서려 있기에 저변을 울린다. 이는 대학의 구조조정이나 등록금 문제와도 직결된다. 4년제 대졸자가 거리에 넘쳐나고, 2년(혹은 1년) 더 배웠다고 폼 잡는 세상이 옳은 것일까.
소설가 이문열은 대학 졸업장이 없다. 서울대 사대를 중퇴했기에 엄격히 따지면 고졸이다. 그가 매일신문에 들어갈 때 채용공고에 난 대졸 ‘학력(學歷)’을 ‘학력(學力)’으로 알았다고 우겨 입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 누가 이문열이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업수이 여기나. 수많은 작품을 통해 지성의 도저한 흐름을 보여준 그는 고졸임에도 한국외대 석좌교수로 초빙됐다.
사회적 약자의 처지 알아야
작가 김훈도 대학 졸업장을 가지지 못했다. 고려대 영문과에 다니다 군대를 다녀온 그는 갓 대학에 입학한 여동생을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러니 공식적으로는 휘문고 졸업이 전부다. 그 역시 학력차별이 없던 한국일보에 운 좋게 들어가 기자로서 필명을 떨쳤고,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자리에 올랐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 등 서양 사람들이 대학을 그만 둔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우리와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문열이나 김훈의 예를 일반화하기는 무리지만 그들이 지금과 같이 졸업장을 따지는 사회라면 어땠을까. 실력과 기개로 공고한 차별의 벽을 깰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학벌사회에 가로막혀 글을 쓰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그런데도 시장에서는 진입장벽을 더욱 높게 친다. 요즘 기업들은 신입사원의 직종이나 직능을 떠나 무조건 ‘4년제 정규대학 졸업자’를 기본 조건으로 단다. 단순 영업직이나 안내직을 뽑으면서도 그렇다. 최근 기업은행이 고졸 여행원을 뽑아 신선함을 던져주었지만 다른 은행들의 호응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기업들이 대졸자 자격을 별 생각 없이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
정부 정책에서도 4년제 대학 위주다. 학생 수로는 전문대가 42%를 차지하지만 예산 비중은 16%에 그치는 것이 서자 취급을 하는 증거다. 그러나 그쪽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2년제나 3년제 전문대에 인재가 많다고 한다. 성적이 낮아서 간 학생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수학 기간이 짧은 전문대를 선택한 학생이 더 많다는 것이다.
기성사회는 고졸자 등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알아야 한다. 청년실업이나 비정규직 대책을 마련하는 공직자가 ‘SKY’ 같은 용어를 아무렇게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식 석상에서 ‘못난 고대’ 운운하고도 부적절한 발언인지 모르는 금융인도 있다. 재벌들은 외국에서 교육을 많이 시키니 이런 문제에 관심이나 있겠나.
언론의 과도한 대학 줄세우기도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기존의 유명 대학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기준을 던져 놓고는 해마다 점수를 낸다. 국가 재정을 쏟아 붓거나 거대 기업의 지원을 받는 대학을 똑같은 출발선상에 세워놓고 경주를 요구하는 게 공정한가.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불필요한 학력 인플레를 조장하고 등록금의 과다한 인상에 기여한 측면이 크다.
광기 어린 교육열 잡을 수도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일을 조화롭게 나누어 하는 게 중요하다. 엘리트 교육은 별개로 치더라도 고교와 전문대, 그리고 4년제 대학 졸업자가 적절한 업무 배분을 통해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지방에서 묵묵하게 전문 혹은 직업교육을 받고 졸업한 학생들을 ‘4년제 대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사회악의 근원으로 지목받는 학력 인플레와 광기어린 교육열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