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당시 일본 보도를 보니
입력 2011-07-07 17:35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역사비평사
명성황후는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했다. 을미사변이다. 사건 직후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내용이다.
“왕비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는데 (중략)왕비가 폭동 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니 생사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10월 11일) “(왕비의 훈련대 해산 움직임에) 분노한 제2연대 소속 1개 대대가 대원군을 앞세워 성안으로 돌입했다 (중략)왕비는 행방불명인데 아마도 살해당한 것 같다”(10월 19일) 얼마 뒤에는 ‘일본 자객들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아 왕궁에 난입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일본 언론이 독자에게 전하려 한 이야기의 윤곽은 자명하다. 왕비가 원인을 제공하고 대원군이 일으킨 쿠데타가 그것이다. 게다가 원인 제공자 왕비는 ‘증오와 질투심에 눈이 멀고’(지지신보) ‘외척정치의 중심’(고쿠민신문)이었으며 ‘세도를 부리며 궁중 풍기를 문란하게 했던’(기쿠지 겐조의 ‘조선 최근 외교사’) 인물이다.
김옥균의 암살 사건 보도는 명성황후 때와 정반대였다. 일본 언론은 1884년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을 용감하고 굳센 일본 남자로, 자객이 그를 살해한 것은 ‘일본 제국에 대한 폭력’으로 포장했다. 미디어의 보도 경쟁이 불붙은 뒤 일본 내에서는 김옥균 유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조선에 돌아가면 ‘사체 효수’가 이뤄질 거라는 주장이었다. 일본인에게 명성황후는 ‘음란하고 부패한’ 악의 화신이었던 반면, 김옥균은 ‘건강한 개혁파’였던 것이다.
국모의 처참한 최후와 김옥균의 암살, 이토 히로부미 저격 등은 지난 한 세기 우리가 되풀이 곱씹어본 비극이지만 가해자 일본 대중들에게 어떻게 유통됐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본 오츠마여대 일본문학과 준교수인 나이토 치즈코가 쓴 책에서 비로소 가해자의 의식 속에 형상화된 피해자 조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일본 미디어가 만들어낸 선악 대결의 스토리텔링이 낯선 발견으로 다가온다. 고영란 등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