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천번 오르니, 산이 내게 오더라… 안흥찬의 한라산 60년
입력 2011-07-07 17:49
사무치게 그리웠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생각이 났고 눈을 감아도 잊을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가 있는 곳만 쳐다봤다. 하루, 이틀, 사흘을 참지 못해 달려갔고, ‘그’에게 안겨 입을 맞췄다. 가장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을 잊지 않으려 새벽에 일어나 붓을 들고 화폭에 새겼다. 시간은 흐르고 육체는 쇠약해졌지만 연정(戀情)은 더 깊어 갔다. 81세 노인은 지금도 ‘그’를 향해 가슴이 뛴다.
소산(素山) 안흥찬. 산악인이고, 또 화가다. 한라산에 매료돼 60여년간 1000번이 넘도록 오르내렸고, 늘 그 기억을 화폭에 담았다. 설암에 걸려서, 3년 전 백록담에 오른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정상을 밟을 수 없다. 해질녘부터 동틀 때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한라산이 수놓인 그림들, 손때 묻은 60년대 미군용 등산가방, 신발, 등산복, 양초… 산에서 숨진 후배에게 받은 엽서까지 원로 산악인의 역사가 깃든 ‘소산 산악관’을 지난 5일 찾았다. 제주시 연동에 있다.
-산은 어떤 존재인가요?
“사악함도 욕심도 명예도 잊는 무아의 경지에 빠지게 해주지요. 탐욕이란 게 없어지니까. 뭔가에 이끌려 산에 가요. 애인을 만나는 것처럼. 안 가면 아침에 깨서 산만 바라봐요. 직장도 산에 갈 수 있는 곳만 골라서 다녔어요. 타의에 의해 직장에 갔다가 자의로 1년, 2년 만에 그만뒀지요. 지금도 마누라에게 미안해요. 잘 때도 등산가방을 머리맡에 두고 잤어요. 사람들이 내가 지나가면 ‘산 귀신 간다’고 했으니까요. 사라호 태풍(1959년 사망·실종 849명) 올 때도 정상에 있었는데 바람이 초속 30m로 부니까 걸을 수가 없었어요. 바람이 휙 불 때는 나무 밑에 엎드렸다가 멈추면 뛰어가곤 했어요. 20대였으니 그땐 힘이 좋았지요.”
-내려갈 산을 왜 오르느냐는 질문, 받으시지요?
“가끔 (그런 질문) 받지요. 아, 내려올 산이니까 가지, 안 내려올 거면 뭐 하러 올라가요? 하하하.”
-젊은 시절과 지금, 산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던가요?
“맞아요. 젊을 때는 산을 정복하러 가고, 나이 들면 반대로 승복(承服)하러 가요. 겸손해지는 것을 배워요. 그게 노인과 젊은이의 차이지요.”
‘나는 미술인이 아니다. 오직 山꾼일 뿐이다. 내가 그리는 대상은 오직 산뿐이다. 한라가 나로 하여금 산을 그리게 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전부가 산이요, 한라이다. 나는 그가 명하는 대로 살 것이고, 그에게 순응할 것이다.’(산악관 한켠에 새겨진 글)
생명을 구하러 20㎞를 달리다
그는 제주 농업학교 다니던 일제시대에 처음 한라산과 만났다가 곧 헤어졌다. 일본 군대가 산에 주둔했고, 해방 후에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나 입산이 통제됐다. 54년 입산이 허용되자마자 학생 때 본 한라산을 잊을 수 없어 곧장 산에 뛰어올라갔다. 그렇게 노인의 ‘한라산 사랑’이 시작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무 옆이나 동굴에서 잠을 청해 가며 2, 3일간 산을 올랐다.
일제 연장으로 나무를 쳐 산에 길을 내고, 밤에는 땔감을 구해 밥을 지어 먹었다. 등산로도, 안내판도, 등산장비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다. 산은 위험했다. 기상 변화가 심한 한라산은 자꾸만 등산객의 생명을 앗아갔다. 1961년 1월 서울대 법대 산악부 11명이 한라산에서 동사했다.
그와 친구 9명은 한국 최초의 민간 구조대인 제주적십자산악안전대를 창설했다. 60년대 후반까지 안전대원으로 활동하며 노인은 100여명의 생명을 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8년 1월 이화여대 등반대 6명 조난사건. 얼마 전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그때 구했던 학생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고 한다. 소녀는 할머니가 돼 있었다.
“(누군가) 조난 되면 내가 뛰어가야 하니까 잘 때도 가방을 머리맡에 두고 잤어요. 조난신고 들어오면 사람 죽을까 봐 막 뛰어가. 집에서 탐라계곡까지 20㎞쯤 되는데 10㎏짜리 구조장비를 등에 지고 4시간을 뛰죠. 한 번은 조선대 학생이 탐라계곡에서 실종됐어요. 갑자기 비가 많이 와 격류에 쓸려간 거지요. 살릴 마음으로 올라갔는데 학생이 이미 바위에 엎드려 죽어 있어. 까마귀가 빼먹은 건지 두 눈은 없고. 너무 처참해서 부모들이 못 보게 막았어요. 구조하면서 괴로운 일도 많았어요. 가끔 꿈에도 조난자가 나오니.”
노인의 후배도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77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고상돈 산악인은 79년 5월 29일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등정한 뒤 하산하다 숨졌다. 산악관에는 고상돈씨가 매킨리에 오르기 직전 보낸 엽서가 있다.
‘대한산악연맹 제주도연맹 회장님 전상서.
자주 소식 드리지 못해 죄가 큽니다. 저희 원정대는 무사히 준비를 마치고 빙하로 향하는 비행기를 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것이 염려해주신 덕택입니다. 등반 기간은 한 달 예정이고 정상은 6월 2일과 7일 두 번 시도할 계획입니다. 신의 은총이 있기를 빌며 사연 줄입니다. 79년 5월 13일 고상돈.’ 이것이 마지막 엽서였다.
나침반이 없던 시절 숲인지 계곡인지 구분이 쉽지 않은 한라산 아흔아홉골에서 길을 잃고 5시간 동안 헤맨 일, 며칠간 눈보라가 그치지 않아 동료와 천막에서 밤새 대화를 나눈 일… 인생의 전부는 산이다.
“백두산과 한라산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산은 호수가 없어요. 물이 없는 산은 뭔가 목마름이 느껴지지요. 육지 산은 위로 곧게 뻗는데 한라산은 완만해요. 그래서 어머니 같고 따스한 느낌이 들어요. 늘 가고 싶어.”
어머니와 아내
노인의 어머니는 두 분이다. 광주에 계신 부모와 떨어져 제주에서 학업을 이어간 노인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최정숙(1902∼1977) 선생을 양어머니로 모셨다.
“양어머니는 제 친어머니의 친구였어요. 친어머니가 저를 보낸 것도 아니고, 양어머니가 저를 데려간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두 분 생겼어요. (양)어머니가 자꾸 내 어머니 같은 마음이 들어, 어머니라 부르고 싶었어요. 7남매로 자라다보니 큰 사랑을 못 받았는데 (양)어머니는 날 너무 사랑해. (양)어머니 집이랑 자취집이랑 왔다 갔다 하다가 ‘나, 어머니 집에서 살래요.’ ‘그럴래?’ 그렇게 열일곱 살 때부터 (양)어머니랑 살았어요.”
양어머니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었다.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3·1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른 최정숙 선생은 수녀의 꿈을 접고 의사가 됐다. 최초의 여성 의학 교육시설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주에서 정화의원을 개업해 극빈층 환자에게 무료 진료를 했다. 이후 제주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에서 무보수 교장을 지냈고, 64년에는 초대 제주교육감을 지냈다.
“자랑 같지만 제가 참 효자였어요. ‘어머니, 가슴으로 낳은 아들도 참 좋죠?’ 늘 그렇게 말하곤 했어요. 의사에 교장이신 어머니가 돈이 많을 거라 생각한 사람도 있었지만 늘 겨우 밥 먹고 사는 정도였어요. 돌아가시기 전날, 제일 좋아하시는 빈대떡을 갖다 드렸는데 다 드시지 못하고 다음날 가셨어요. 옷 한 벌 못 사드린 게 가슴에 남아요.”
아내도 어머니의 소개로 만났다. 스물아홉, 당시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와 결혼한 그는 결혼식 사흘 만에 한라산에 갔다. 아내는 결혼 후 40여년간 묵묵히 돈을 벌었다. 자연과 산을 좋아하는 남편, 일찌감치 마음을 비웠다.
“이 양반은 첫째가 산이야. 그 다음이 나야.” “아니야, 당신은 셋째야.” “둘째는 자식, 셋째가 나인가 보네.” 노부부는 대화를 나누다 껄껄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고 배운 여자라 하는데 나 때는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 그렇게 살았지 뭐.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돈 생길 때마다 짓느라 6년 걸렸어요. 한번은 이 양반이 한국전력 서귀포영업소장 할 때인데 집에 전화가 와요. 소장님이 나갈 때가 아닌데 그만뒀다면서. 위에서 구조조정 한다며 직원 두 명 자르라 했더니 이 양반이 부하 직원 대신 나를 자르라면서 나간 거야. 그런 식으로 회사 그만둔 게 두 번쯤 돼요. 다른 사람 위한 일인데 뭐라 말할 수 있나? 속으로만 아쉬웠어요. 간섭 안 하는 게 나도 편해.”(아내 김경희씨)
남편이 한국전력 퇴직금으로 받은 돈은 800만원이었다. 그중 아내에게 건넨 돈은 500만원. 노인은 한라산이 새겨진 도자기 만드는 일에 나머지 300만원을 썼다. 아내는 50년이 넘도록 불평이 없다.
산이 그리라 하네
노인은 산악인이고 화가이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77년인가 한라산을 기록으로 남기려 스케치를 시작했고 이듬해부턴가 묵화를 그렸다. 노인의 그림은 특징이 있다. 수묵화인데도 화선지가 아닌 캔버스에 묵과 아크릴 물감을 섞어 그린다. 산세는 물감으로, 어둔 밤하늘은 묵으로, 구름은 다시 물감으로 그리는 식이다.
“난 배운 곳이 없으니까, 내 마음대로 하니까 아주 편하죠. 내가 화가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애인 이름 쓰듯이 그림을 그려요. 내가 본 산 아닌 건 손도 못 대죠. 제 그림 보고 미술 하는 사람들이 물었어요. 동양화를 캔버스에 그리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먹이 캔버스에 묻더냐고.”
그는 미술 하는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 공모전에 그림을 출품해봤다. 85년 한국서화작가협회전 한국화 부문 최우수상, 86년 한·불 수교 100주년 기념 서울국제미술대전 입선.
서울 안국동 백상미술관에서 85년 9월 전시회를 연다고 하자 아내가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당신은 미술 전공도 아닌데 거기가 어디라고 전시회를 해요?” 그러자 젊은 시절의 노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한라산에 관한 한 말하지 마.”
‘산수를 그리는 많은 화가들이 오직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는 것이 인위적인 행위라면 그의 그림은 자연스러운 표현 행위다. 산수를 그리기 위해 애써 신선을 만나야 할 필요도 없으며 눈치를 볼 것도 없다. 그의 그림은 새로운 세계다.’
미술평론가인 박용숙 전 동덕여대 교수는 그의 그림을 이렇게 평했다. 당시 전시회에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 등이 방문했다.
“(산에) 미친 사람은 꿈에 산이 나타나요. 깨 보면 새벽 2시, 3시예요. 아, 이거 그냥 자면 다시는 기억 못할 것 같아. 바로 그림을 그려요. 그렇게 그린 게 ‘몽중한라’입니다.”
이제껏 아홉 차례 전시회를 연 안흥찬 화백은 31일까지 제주 한라산국립공원 어리목 탐방안내소에서 ‘한라산 품에 안기어’전을 연다.
81세 노인은 지금도 하루 24시간이 짧다고 했다. 오전에는 지방신문, 중앙일간지, 책을 읽고 오후에는 병원에 가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전거를 1시간씩 타며 산악회 모임을 갖는다. 틈틈이 차를 타고 한라산에 찾아가고 그림을 그린다. 잡념은 없다.
노인에게 꿈을 물었다. 3년 전 등반이 마지막이었기에 다시 정상에 오르는 게 소망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후배들이 산에서 안전하게 오르내리는 일이지요. 또 순리대로 살다 떠나고 싶어요. 후배들이 먼저 가면 충격이지요.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고 싶어요.” 노인은 욕심이 없다. 한라산처럼.
제주=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