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7-07 17:41
종교개혁 운동의 역사적 전개 과정(1) 칼뱅-파렐 종교개혁 손잡아
◇칼뱅의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르디(Picardy) 주의 노용(Noyon) 읍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이면서 노용 대성당 참사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던 아버지 게라르 코뱅(Gerard Cauvin)과 지방 귀족의 딸이자 아름답고 경건한 어머니 진 르프랑체(Jeanne LeFrance) 사이의 네 형제 중 막내다.
1523년부터 28년까지 파리대학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1526년 사보이 가문의 횡포를 막기 위해 제네바와 프라이부르크, 베른을 중심으로 스위스 도시연맹(Swiss Confederation)을 조직하였다. 1528∼33년 성직 소명에 회의를 느끼고 아버지의 권고로 오를레앙(Orleans)과 부르주(Bourges)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종교개혁 신앙을 접하게 되고 법률사무소를 개업할 자격을 취득하였다.
1530년 10월 19일 주교가 제네바의 군주직을 계속하게 하되, 비돔네 총독의 권한은 크게 축소시키고, 도시민의 특권을 존중하는 200명의 시민총회가 중요한 결정을 하는 기구가 되도록 하였다. 1532년 3월 제네바의 대표들은 루터주의로 기울었고, 그해 가을에 파렐(Guillaume Farel)이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도착하였다. 1533년 2월 22일 파렐, 비레 그리고 프로망은 300∼400명에게 복음주의 설교를 하였으며, 종교개혁 의식에 따른 최초의 세례가 집례되었다.
1533년 종교개혁 신앙을 발견하고 가톨릭을 떠났다. 1534년 성직소명 특혜를 포기하였다. 1535년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파리에서 바젤(Bazel)로 피신하여 연구생활에 몰두하였다. 1535년 5월 30일부터 6월 24일까지 다섯 개의 ‘복음주의 논제’에 대한 공개토론회가 있었고, 제네바 시민들이 종교개혁 신앙을 더욱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시민들의 강한 요구에 의하여 8월 8일 성 베드로 성당에서 파렐이 최초로 설교하기에 이르렀고, 11월 29일 수도사들과 세속 성직자들이 시의회의 질문에 신통한 답변을 주지 못하자, 종교개혁은 제네바에서 적법하고 굳건한 자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1536년 3월 27세의 젊은 나이에 프로테스탄트를 대표하는 조직신학 저술인 ‘기독교강요(Institutio Religionionis Christianae)’의 초판을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썼다. 모두 4장으로 사도신경 주석의 형태로 성부, 성자, 성령, 교회의 순서로 저술하였다. 이때에는 예정론이 신론 부분에 나왔지만 마지막 개정판에서는 교회론과 은총론 부분에서 취급하였다.
1536년 7월 파렐의 간절한 요청으로 제네바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1537년 제네바의 청년들이 지켜야 할 기독교 윤리적 가르침인 ‘신앙지침(Instruction in the Faith)’을 만들어서, 십계명과 산상수훈의 영적 의미를 현실생활에 적용하도록 하였다.
1538년 2월 3일 칼뱅과 파렐의 강력한 반대파 네 사람이 특별평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성만찬을 매주 행하는 것과 출교시키는 것이 무리라고 여겨져 4월 24일 총회에서 추방 명령을 받게 되었다.
김홍기 총장 (감리교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