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권리, 소송의 기술을 만나다

입력 2011-07-07 17:47

#1. 회사원 이모(40)씨. 2008년 7월 집을 사려고 A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로 1억1000만원을 빌렸다. 대출계약 때 은행은 ‘근저당 설정비’ 150만원을 이씨에게 내라고 했다. 근저당은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빌리는 사람의 재산을 담보로 잡는 법적 장치다. 은행이 필요해서 하는 건데 그 비용은 이씨가 부담했다. 은행들은 줄곧 그렇게 해왔다. 당장 돈이 필요한 이씨는 군소리 없이 150만원을 냈다.

지난해 10월. 공정거래위원회와 은행들이 법정 다툼을 벌였다. 공정위는 근저당 설정비를 대출자에게 부담시키는 관행이 부당하다 했고, 대법원은 공정위 손을 들어줬다. 은행들은 올 7월부터는 근저당 설정비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럼, 이씨가 2008년에 1억1000만원 빌리면서 냈던 150만원은 안 내도 되는 돈이었다는 건가?

인터넷을 보니 시민단체 금융소비자연맹이 이 사안에 대한 ‘집단소송’을 준비 중이다. 은행에 근저당 설정비를 낸 사람은 누구나 소송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소송 참여 비용은 단돈 3만원. 승소하면 10% 성공보수를 변호사에게 주더라도 130만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 이씨는 소송에 참여했다.

이씨처럼 이 소송의 원고가 된 사람은 7000명이 넘는다. 금융소비자연맹은 이달 중순 17개 은행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할 예정이다. 은행들이 지난 10년간 대출자에게 받은 근저당 설정비는 1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2. 지난 5월 경북 구미시와 칠곡군 일대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단수(斷水) 사태가 벌어졌다. 상수원인 구미광역취수장의 임시 물막이 보가 유실돼서다. 이 보는 4대강 정비사업을 위해 강바닥을 준설하며 일정한 수량을 확보하려고 한국수자원공사가 설치했는데 떠내려가 버렸다.

시민단체 구미풀뿌리희망연대 이대성 팀장 등 주민 1만7649명은 최대 7일간의 단수 피해를 입었다며 지난달 23일 구미시와 한국수자원공사를 상대로 18억4755만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대구지법에 제기했다. 마침 같은 내용의 소송을 준비 중이던 법무법인 경북삼일과 함께 진행했다.

이 팀장이 승소할 경우 받을 수 있는 배상액은 하루 3만원씩 21만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구미시와 수자원공사에 경고를 보내고 싶었다고 한다. 돈 문제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의 무책임함을 꾸짖고 싶었다는 것이다.

희망연대는 승소할 경우 경북삼일에 배상액의 30%를 성공보수로 지급하고, 패소하면 모든 소송비용을 경북삼일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이번 소송을 맡겼다. 인지대만 700만원인데 경북삼일은 흔쾌히 납부했다. 대신 승소하면 5억원이 넘는 성공보수를 챙길 수 있다.

#3. GS칼텍스의 자회사 GS넥스테이션 직원이던 정모씨. 2008년 7월 회사 서버에 접속해 보너스카드 회원 1151만7125명의 성명, 주민번호,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등을 DVD에 담아 빼냈다. 그러곤 이 DVD 복사본을 쓰레기 더미에서 주웠다고 신고하며 언론에도 알렸다. 고객정보 유출이 이슈로 부각되면 DVD 원본을 더 큰돈에 팔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작극이 밝혀지자 강모씨 등 정보유출 피해자 2만8000여명은 1인당 100만원씩 모두 280억원을 배상하라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GS칼텍스와 GS넥스테이션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이렇게 많은 원고인단이 꾸려진 것은 1인 1만원의 저렴한 소송비용 덕이었다.

2007년 일본에서도 야후 재팬이 1100만명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당했고, 피해자 5명이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소송을 내서 승소했다. 이 판결을 모델 삼아 백승우 변호사는 인터넷을 통해 피해자를 모집하고 집단소송을 주도했다.

결과는 원고 패소. 1심 판결에 대한 실망 탓인지 항소심에선 원고가 2200명으로 대폭 줄었다. 이런 소송이 변호사 배만 불리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와 백 변호사는 아예 소송비용을 받지 않았다. 대신 승소할 경우 성공보수를 높게(20%) 책정했다. 280억원짜리 대형 소송은 원고가 줄면서 22억원짜리가 됐다.

항소심에서도 원고들은 패소했다. 재판부는 “개인정보 유출만으로 정신적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없으며 개인정보가 유출 직후 바로 회수돼 구체적 피해가 발생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백 변호사는 상고할 예정이다. 이번에도 소송비용은 받지 않는다.

권리의식의 신장?

집단소송. 클래스 액션(Class Action)이란 이름으로 1938년 미국에서 처음 도입됐다. 소수의 피해자가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승소할 경우,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같은 피해를 입었다면 누구나 같은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

이 소송이 국내에선 소송에 참여한 사람만 배상받는, 그냥 많은 사람이 참여하니까 ‘집단’이란 이름이 붙는 제도가 됐다. 위 사례 중 근저당 설정비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해도 배상을 받는 건 이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뿐이다. 근저당 설정비를 냈던 다른 사람이 배상받으려면 따로 소송을 내야 한다.

그럼에도 집단소송은 최근 눈에 띄게 빈번해졌고, 이 현상엔 두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얽혀 있다. 첫째, 관행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사람들이 그동안 당연시했거나 불가피하다고 넘겼던 일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시민의식, 권리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둘째, 숫자가 갑자기 늘면서 일감이 부족해진 변호사들이 새 시장을 개척하려 집단소송에 뛰어들고 있다. ‘기획소송’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집단소송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법원이나 변호사협회가 따로 통계를 내지 않는다. 다만 변호사 업계에 따르면 다수의 원고가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내는 경우는 분명히 늘고 있다. 아주 최근만 해도 인천 청라지구아파트 집단소송, 오존세척기 집단소송 등이 추진되고 있다.

장진영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생 시절이던 2006년 7월 항공마일리지 약관을 ‘1000원에 2마일’에서 ‘1500원에 2마일’로 일방 변경한 당시 엘지카드(현 신한카드)를 상대로 ‘나 홀로 소송’을 벌였다. 완승을 거뒀고 내친 김에 집단소송까지 준비하며 원고인단을 모집했다. 그러자 엘지카드 측은 소송이 제기되기 전에 장 변호사와 같은 경우에 놓인 회원 1만명에게 1인당 9만원씩 9억원을 보상했다.

장 변호사는 “카드사가 일방적으로 약관을 바꾸는 걸 보면서 법 지식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에 소송을 냈다. 내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소송을 냈고 정말 많은 사람이 동조해 원고가 되려 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권리를 찾으려 하자 기업이 먼저 보상 얘기를 꺼내더라는 것이다.

IT 기술의 발달도 집단소송의 동력이 됐다. 대부분의 집단소송 원고 모집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이뤄진다. 누군가 인터넷에서 피해 사례를 알리고 인터넷을 통해 동조자를 모으면 소송 요건이 갖춰지는 식이다. 네이버 다음 등 대형 포털사이트에는 지금도 집단소송 관련 카페가 무수히 개설돼 있다.

변호사의 일감?

요즘 앉아서 사건을 기다리는 변호사는 없다. 치열한 경쟁 탓에 적극적으로 사건을 발굴하고 만들어야 변호사가 살 수 있다. 곽란주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졸업자 1000명 시대를 맞아 수임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무실 운영이 쉽지 않다. 신문의 사건기사 등을 보면서 집단소송이 가능한지 법리를 꼼꼼히 따져보는 변호사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 피해 역시 대량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변호사도 ‘박리다매(薄利多賣)’ 수익창출에 뛰어든 것이다.

집단소송이 빈발하면 변호사 배만 불린다는 지적에 대부분의 변호사는 불편해한다. 일부 그런 면이 있더라도 공익적 측면이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 조정환 변호사는 “집단소송이 제기됐다는 얘기는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재판에서 이겨 돈 벌었다는 변호사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승소하면 많은 성공보수를 받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GS칼텍스나 옥션의 고객정보 유출 사건은 모두 원고 패소였다. GS칼텍스 집단소송을 주도한 백승우 변호사는 “1심에서 수임료 등으로 1억원을 받았지만 패소하는 바람에 2, 3심 수임료는 무료로 하고 제반비용도 모두 내가 부담했다”고 말했다.

구미시 단수피해자 집단소송을 맡은 백영기 변호사는 아예 1심부터 인지대와 송달료, 수임료를 받지 않았다. 그는 “집단소송을 부정적인 면만 본다면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사라지게 된다. 소액 피해자가 권리를 주장하고 구제받을 법적 창구가 막히는 것”이라고 했다.

집단소송의 변신

집단소송은 정치의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다. 한나라당은 2008년 10월 불법집회 피해자가 시위 주최자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 ‘불법집단행위에 관한 집단소송법’을 제정하려 했다. 촛불집회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상황의 재발을 막으려는 것이라는 지적이 잇따랐고, 야당이 강력 반발하면서 흐지부지됐다.

민주당 우윤근 의원도 2008년 11월 식품안전사고 등으로 50명 이상의 집단 피해가 발생할 경우 쉽게 피해구제를 받도록 한 집단소송법을 발의했다. 재계가 반대해 본격적인 논의도 못한 채 국회에 계류 중이다.

몇몇 원고만으로 소송을 내서 승소 가능성을 타진한 뒤 결과에 따라 대규모 소송인단을 꾸리는 신종 전략도 나왔다. 장진영 변호사는 “대법원 판례가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원고인단을 동원하면 법원도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 그래서 전략을 바꿔 일단 소규모 소송을 진행해서 판례를 만든 다음 대규모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아직 기업의 잘못에 대해 기업의 존폐가 걸릴 정도의 배상액을 물리는 징벌적 손해배상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의 집단소송은 소비자 권리를 보호하는 공익적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