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언어 중 가장 힘센 영어, 그 힘의 원천은
입력 2011-07-07 17:37
‘글로비시’/로버트 매크럼/좋은책들
영어의 역사에는 몇 차례 운명이라 부를 순간이 있었다. 이를테면 1066년 노르망디공 윌리엄1세의 잉글랜드 침공 같은 것 말이다. 노르만족과 앵글로색슨족이 불편하게 공존하던 이 시기, 잉글랜드에서는 피지배자 언어인 영어와 지배자 언어인 프랑스어가 분리됐다. 영어에는 기회였다. 영어는 이중언어 생활을 발판으로 앵글로색슨족의 민족 정체성과 저항정신, 동질감을 담은 민족어로 발전했다. 노르만족이 fortress(요새) siege(포위) assault(습격) prison(감옥) 같은 전쟁어휘를 남기고 떠난 뒤 영어의 토대는 더 넓고 굳건해졌다.
영어의 2차 도약에는 대영제국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번에는 무대가 지구촌이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며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 등지로 퍼져나간 영국의 군사력은 영어의 글로벌 전성시대를 가져왔다. 영어는 뉴질랜드와 짐바브웨, 홍콩, 남대서양의 포클랜드제도까지 퍼져나갔다. 스팽글리시(이베리아 반도의 영어), 힝글리시(힌두어+영어), 벵글리시(벵골식 영어), 재플리시(일본식 영어), 콩글리시(한국식 영어) 같은 변종도 번성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2억명이 61개의 변종 영어를 쓰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의 언어, 글로비시(global과 English의 합성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들이 실용어휘를 조합해 의사소통하는 단순한 형태의 영어)가 된 것이다.
책은 영어의 역사인 동시에 영어를 주인공으로 한 평전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로마제국이 브리타니아에서 물러난 5세기 초부터 중국에서 영어 배우기 열풍이 벌어진 21세기 초까지 영어의 한평생을 따져본다. 셰익스피어, 킹 제임스 성경, 마크 트웨인 같은 영어 발전의 주역들도 다뤘다.
인터넷을 오가는 언어의 80%는 영어이고, 국제무대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힘 있는 보도는 영미권 뉴스채널인 CNN과 BBC에서 시작된다. 저항하려는 이도, 지배하려는 독재자도 영어로 선전한다. 차도르 쓴 이란의 여성과 북아프리카의 젊은이들, 러시아와 싸우던 그루지야의 대통령도 영어로 말했다. 영어로 말했을 때 힘이 커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어가 만들어낸 시장은 또 얼마나 큰가. 지금 힘이 너무 세서 한·중·일 3국이 한 해 영어를 배우기 위해 들이는 돈은 아프리카 중급 국가의 1년 예산쯤은 너끈히 넘어선다.
그래서 영어의 힘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더 많이 연결된 세계에서 영어의 효용성도 반박하기는 힘들다. 다만 영어가 글로비시가 된 게 영어 고유의 특징 때문이라는 저자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영국 ‘옵서버’ 부편집장인 저자는 영어의 유연성과 개방성, 대중성, 융통성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영국인의 영어 사랑을 비난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 책이 500쪽 가까운 분량을 할애해 꼼꼼하게 되돌아보았듯 영어의 확산은 영어의 내적 특징보다는 영어를 쓰는 국가의 힘과 연동돼 왔다. 영국 미국의 정복과 확장, 두 국가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 그게 영어의 힘이었다. 그러므로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는 시대에 영어의 미래도 낙관할 일만은 아니다. 이수경 옮김.
이영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