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7) “의료선교 자신 있다” 어색한 프러포즈

입력 2011-07-07 21:37


“오빠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긴 거야?” 이종 사촌여동생이 다짜고짜 따졌다. “뭘 말이야.” “정신이 말이야.” “아, 그 자매가 며칠 전 나를 찼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오빠가 공부한다고 만나주지 않으니 그런 거 아냐. 정신이가 그렇게 무심한 사람과 결혼하면 평생 고생한다고 그러던데.”

아차 싶었다. 나는 한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교만하게도 내 마음대로 행동했다. 사실 그 자매를 만나면서 내심 나의 기도제목을 말하면 들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무엇보다 교회에 헌신하셨던 목사님 사모님을 보며 ‘저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딸이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정신 자매에게 급히 연락했다. “미안합니다.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광림교회 앞으로 다시 나와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교회 대예배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사는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했기 때문에 돈 많이 벌고 아내를 풍족하게 해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평생 헌신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런 나와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동안 기도해 보시고 내일 이 자리에서 답변해 주세요.”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얘기지만 참 기가 막혔다고 한다. 프러포즈라고 하기에 너무 비장하면서도 상황이 우스꽝스러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기 위해 확실한 비전을 가졌다는 게 끌렸다고 한다. 결국 ‘이 정도면 믿을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윽고 다음 날이 됐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를 했다.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한양대 의대 도서관이었다. 공부양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자매는 요점정리 된 선배들의 책을 보고 내 책에 형광색 펜으로 줄을 대신 그어 주었다. 우리는 1987년 10월 약혼을 하고 88년 4월 결혼에 골인했다.

아내는 정말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 목회자 딸 같지 않은 수수하면서도 따스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걸 신앙의 ‘온실효과’라고 말하고 싶다. 평생 새벽제단을 쌓으신 두 분은 늘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는 믿음의 대를 적극적으로 준비해 가는 것’이라며 생활로 신앙을 보여주셨다.

장인어른인 김선도 목사님은 교회 건축이나 선교, 봉사 등에서 솔선수범하셨다. 당신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교회를 위해서라면 사례비 전부를 드렸던 분이다. 장모님도 짝이 다른 양말을 신으실 정도로 절약하셨지만 그 돈을 모아 장학금을 지원하실 정도로 품이 넓으셨다. 이런 모습을 본받았는지 아내는 대학 4년 내내 용돈을 직접 벌어 생활했다.

평생 선교에 헌신하셨던 두 분은 2남1녀의 신앙과 예절교육에 철저하셨다. 세 자녀의 각자 개성을 존중했지만, 인간의 도리나 예의범절에서 조금만 빗나가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고 한다. 그렇게 자란 두 오빠는 현재 광림교회 담임목사(김정석)로, 명지대 교수(김정운)로 일하고 있다.

장인어른은 딸을 무척 아끼셨다. 해외선교나 지방 부흥회 때문에 집을 비우면 아내는 장모님을 대신해 두 오빠의 식사는 물론 뒤치다꺼리를 모두 챙겼던 순종적인 딸이었다. 78년 성전 건축을 위해 20일간 금식기도를 하고 돌아오신 장인·장모님은 오빠들을 돌본 중학생 딸을 보고 기특한 마음에 용돈을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내는 그 돈을 몽땅 건축헌금으로 드렸다는 것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