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6) 서울생활 위해 옮긴 교회서 배필 만나
입력 2011-07-06 18:21
선교의 평생 동역자인 아내 김정신 권사를 만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다.
1981년 한양대 의대에 입학하면서 나는 인천성산교회의 청년부 회장을 맡게 됐다. 주일엔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원 등으로 하루 종일 바쁘게 지냈다. 인천 집에서 서울 행당동 학교까지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의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에 들어가면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학교 근처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해부학 실습과 시험 준비 등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취를 하니 교회까지 옮겨야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시작으로 소망교회 영락교회 정동교회 새문안교회 등을 다니며 정착할 교회를 찾았다. 그러다 광림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김선도 목사님의 카리스마 넘치는 말씀을 듣는 순간 ‘이 교회다’ 싶었다.
교회는 83년 천막교회 시절을 마치고 건물을 완공한 상태였다. 근처는 개발이 막 진행되고 있었다. 현대아파트 건축이 끝났고, 높은 건물이라고 해봐야 영동백화점밖에 없었다. 강남은 상권이 형성되지 않았기에 명동과 광화문이 문화의 중심지였다.
내가 김 목사님의 설교에 매료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설교 중에 미생물과 면역체계 등 의학전문 용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의대생이었던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목사님이 어떻게 의학전문 용어를 잘 알고 계실까. 굉장히 전문적인 내용인데.’
나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희망과 치료, 회복의 메시지에 점차 빠져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 목사님은 해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신 의사 출신의 목회자였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의무병으로 강제 징집됐다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탈출한 뒤 국군에 투항해 의무장교를 지낸 드라마 같은 이력을 지니고 계신 분이었다.
84년 초 이종사촌 동생의 약혼식 자리였다. 나는 동생과 함께 바이올린 축가를 연주했다. “바이올린 연주하는 저 친구가 누구죠?” 김 목사님이 외삼촌께 질문을 던졌다. “예, 제 이종조카인데 한양대 의대에 다니고 있습니다.”
얼마 후 외삼촌이 광림교회 앞 빵집으로 나를 호출하셨다. “좋은 자매를 소개시켜 줄 테니 꼭 만나봐라.”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말쑥한 외모와 의대 오케스트라 악장을 담당하며 여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누군데요?” “김선도 목사님의 따님이다.” “예? 목사님 친딸이라고요?”
상대는 연세대 교회음악과에 다니는 1학년 여학생이었다. “저, 이창우라고 합니다.” “아, 예.” “이름이 뭐죠?” “김정신이라고 해요.” “뭐 좋아하세요?” “그냥 책 읽는 것 좋아해요.” “저는 앞으로 선교에 헌신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해오고 있습니다.” “아, 네.”
대학 1년생인 그녀는 애송이처럼 보였다. 화장을 짙게 하고 성숙미가 물씬 풍기던 동기생들을 만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촌스러운 여학생을 만나니 별로 감흥이 오지 않았다. 목사님 딸이라 부담도 컸다.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두세 달에 한 번 의무적으로 만났다. 막상 만나면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84년 가을. 갑자기 그녀가 나를 만나자 했다.
“우리 그만 만나기로 해요.” “예?” “창우씨는 저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공부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그 말은 지금 저를 차겠다는 겁니까.” “예.” 주변의 여학생들로부터 한 번도 거절을 당해 본 경험이 없었던 나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내말 잘 들어보세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도, 끝내는 것도 손 위의 남자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겁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