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연기 사라지는 날까지 오늘도 걷는다… 폐암 말기 환자 장근수씨 금연전도사되다
입력 2011-07-06 18:03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서울 여의도공원을 울렸다. 행인들이 귀를 기울였다.
“담배를 피우면 폐가 이렇게 됩니다. (담배는) 독약입니다.”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노인이 보여주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폐암 말기 환자인 노인의 폐 사진. 허연 암세포가 폐를 뒤덮고 있었다. 둘러멘 배낭에 부착한 문구 역시 담배의 해악에 관한 경고 내용이다. “당신이 내뿜는 담배연기. 자신은 물론 주위 여러 사람의 모든 암, 특히 폐암을 유발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이 경고 문구를 정하는 데도 많은 기도를 했다는 금연전도사 장근수(67·경기 부천 은성제일교회)씨.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목소리를 높여 금연홍보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담배와의 첫 만남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 5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손을 잡고 38선을 건넜다. 남쪽에 발을 디딘 뒤 한 해가 지나 한국전쟁을 맞았다. 가난은 견디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호방한 성격은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큰 체격, 화통한 성격에 맞게 그는 고등학교까지 럭비선수로 활약했다. 그때까지 담배와의 인연은 없었다.
“동료, 후배들이 담배를 많이 피웠죠. 근데 난 싫었다고. 담배 피우는 사람 치고 운동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 그는 동료, 후배들이 담배를 입에 물 때마다 호통을 치며 막았다. 담배와의 첫 만남, 유쾌하진 않았다.
그 두 번째 만남은 군대에서였다. 훈련 중 휴식시간에 선임병의 권유로 무심코 입에 문 하얀 막대.
“1965년이었을 거야. 군 생활할 때 모두가 담배를 피우니까 안 피우면 할 일이 없더라고요. 그 10분 동안의 휴식 시간, 담배 연기에 시름을 담아 내뿜곤 했죠.”
연기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게 참 신기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와 담배는 둘도 없는 친구가 돼 버렸다. 윗옷 가슴팍에 붙은 주머니는 언제나 ‘솔’ 담배의 자리였다. ‘솔’이 든 주머니춤을 만질 때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담배, 어느새 그의 유일한 낙이 됐다. “건설회사에서 일하다보니 사람 상대할 일이 많은데 담배를 피우면 자연스럽게 얘기가 이어지곤 하더라고요. 언짢은 일이 있어도 담배 하나 물고 얘기하면 화해가 되기도 했고.”
하루 한 갑 이상은 기본이었다. 화가 날 때도, 기분이 좋을 때도. 그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엔 담배가 꽂혀 있었다.
폐암, 그리고 시한부 인생
건강엔 자신 있었다. 몸에 이상도 없었다. 회사에서 하는 정기검진조차 받지 않았다. 암(癌)? 그냥 남 얘기에 불과했다. 40여년 담배를 피우면서도 암 걱정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2007년 5월 어느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던 그에게 감기의 옷을 입은 암이 스며들었다.
“감기 기운이었죠. 목이 깔깔한 느낌. 목감기 같아서 약 먹고 따뜻한 차를 마셨죠. 보름이 지나는데도 차도가 없더니 급기야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이상하다 싶었죠.”
그를 오래 지켜봐 온 친구 김창성(67·오렌지카운티교회) 목사의 눈에도 장씨의 몸엔 이상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김 목사는 장씨의 손을 잡아끌었다. 고집을 부리는 친구를 USC 메디컬센터에 입원시키고 검사를 받게 한 것.
검사 이틀째. 의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몇 가지를 물었다. “담배를 하루에 얼마나 피웠나.” “몇 년 동안 피운 건가.” “흡입 정도는 어땠나.” 대답을 하며 장씨는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했다. 하나하나 장씨에게 아픈 질문들이었다.
폐암 말기 판정.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암은 어깨로 전이됐다. 크디 큰 바늘로 계속 찌르는 것 같았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아픔. 고통은 하루하루 커졌다. 의사의 말은 그를 한 번 더 낙담시켰다. “길어야 6개월.”
앞이 캄캄했다. 누군가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친 듯한 느낌. 절망의 시간은 시작됐다.
신앙을 얻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면서 고통을 배가시킨 건 다름 아닌 언어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홀로 누워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죽어도 내가 태어난 곳에서 죽으리라.’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신앙은 얕았다. 미국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사람을 사귀기 위해 교회 문을 두드렸을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뭐 신앙이 중요한 건 전혀 몰랐죠. 그냥 나 편하자고 다닌 거니까.”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마지막 예배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항상 예배 시간이면 의미 없이 되뇐 사도신경. 그날따라 두 눈에서 눈물이 홍수를 이뤘다. 30분이나 계속됐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기도가 흘러나왔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말기 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 그는 죽을 방법을 찾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어떻게 해야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편하게 죽을지 고민했다. 열차에 뛰어들까, 높은데서 떨어져볼까….
눈물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한 뒤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나갔고 시간 날 때마다 성경책을 펴들었다.
“하루는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다 눈물이 나면서 너무 살고 싶은 거예요. 30분 동안 울며불며 기도했죠. 생떼를 쓴 거지. 나 좀 살려달라고…. 그런데 그날 밤 꿈에 하얀 형체만 보이는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가장 아팠던 왼쪽 쇄골 부위를 손으로 강하게 치시더군요. 화끈 열이 오르더니 아프던 곳이 시원해지는 겁니다. 그러더니 ‘너 아직도 멀었어’라는 말을 남기곤 사라지셨어요. 눈을 떴을 때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죠.”
‘아직도 멀었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이는 많이 들었지만 신앙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차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때 친구 김 목사가 누누이 한 말도 함께 떠올랐다. “네 병은 하나님만 고치실 수 있어.” 맞다. 정답은 그거였다.
금연운동에 나서다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 생활부터 달라졌다. 새벽기도를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몸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성경을
필사하며 은혜를 받았다. 몸이 나아지자 투병 가운데 얻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배낭을 메고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흡연, 그 해악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특히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청소년들.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담배를 입에 무는 아이들에게 위험을 알리고자 했다.
“산에 금연 현수막을 걸어놓으면 찢어놓기도 하고 비꼬기도 하고 힘든 점도 많아요. 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곳도 많지 않고요.”
하지만 보람을 느낄 때가 더 많다. 그의 활동 때문에 아들이 담배를 끊었다며 감사하다는 한 아주머니의 말, 가슴이 뭉클했다.
“(배낭을 가리키며) 이거 안 메고 집 나가는 적이 거의 없어요.”
그의 가방 안엔 성경, 성경 필사를 하고 있는 공책, 금연전단지 등이 들어 있다.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그에겐 두 가지 꿈이 있다.
“호스피스. 사실 나이 든 암 환자인데 누가 시켜주겠어요. 하지만 죽음 문턱까지 갔다 왔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생을 행복하게 마무리하도록 돕고 싶어요.”
또 하나의 꿈은 가방에 붙인 문구를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각각 써서 아시아를 돌아다니며 흡연의 위험성을 알리겠다는 것. “하나님이 저한테 허락하신 일이 금연홍보잖아요. 최선을 다해 저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도록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보답할 수 있는 일, 하나님이 한 번 더 주신 목숨 걸고 해야죠.”
글 조국현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