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토요봉사 현장… 도배 척척 문짝 뚝딱 땀은 송글
입력 2011-07-06 13:47
“6월 집수리 봉사 가정을 선정하기 위해 경기도 포천에 답사를 갔습니다. 처음 그 가정에 들어갔는데 너무도 젊은 남자가 나와 마음이 확 닫힐 뻔했습니다. ‘이렇게 젊은 남자가 사는 집을 수리해줘야 하나’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과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몇 년 전 일하다가 떨어져서 눈이 멀고,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가는 아들을 위해 공부방을 하나 마련해주고 싶다고 합니다. 현재 월세 5만원에 살고 있습니다. 공부방을 만들고, 안방 도배를 하고, 문짝을 바꿔주고, 담장을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의 양이 많습니다. 손이 필요합니다.”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산하 토요봉사대(이하 ‘토봉’) 게시판에 올려진 글이다.
아빠와 딸이 함께 집수리 현장으로
1주일 이상 이어진 장맛비 탓에 ‘토봉’은 정해진 봉사를 연기해야 했다. 집수리는 야외 작업이 많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2일 모였다.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8리. 평소보다 많은 15명이 나왔다.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는 관리자의 SOS 덕분이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집주인 이영길(46·포천 일동감리교회)씨는 한의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 그의 아내가 자리를 지켰다.
탑차와 승합차가 공구와 필요 자재를 싣고 줄줄이 집 앞으로 들어왔다. 이날의 봉사대원은 남성 11명, 여성 4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각자 맡은 파트에 따라 공구를 들고 작업장으로 하나 둘 들어갔다. 그 가운데 유난히 다정한 남녀 대원이 눈에 띄었다. 부녀대원이다. 개인사업을 하는 정유석(47·서울 광염교회) 한나(21·총신대 사회복지학과2)씨 부녀. 두 사람은 창고의 출입문을 떼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창고를 공부방으로 개조하기 위해 부녀를 포함한 4명이 들어가 구슬땀을 흘렸다. 형광등과 창문도 떼어냈다. 이어 분홍색 스티로폼 단열재를 틈새 없이 벽에 붙였다. 그 위에 석고보드도 덧댔다. 그리고 부녀는 창고 밖에서 페인트칠을 할 벽을 고르게 하기 위해 벽을 긁어냈다.
2005년 시작된 ‘토봉’은 매달 넷째주 토요일에, 그보다 1년 전에 시작된 또 다른 봉사전도대는 매달 둘째주 일요일에 집수리 봉사를 나간다. 줄여서 ‘토봉’ ‘일봉’이라고 부른다. 정씨 가족은 둘 다 참여하기 때문에 ‘양봉’이라고 했다. 아내 김진숙(43)씨는 얼마 전부터 직장에 나가 지금은 ‘일봉’만 한다.
“평소 봉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봉사전도대 대원으로 일하는 지인의 권유로 2006년 12월부터 한 달에 두 번 나가고 있어요.”
딸의 변화에 흐뭇한 아빠
정씨는 ‘토봉’ 돌아가는 사정도 잘 알았다. 우선 집수리 대상 가정 선정은 그 지역 목회자나 사회복지사가 추천한다. 그러나 단순히 말만 듣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현장답사를 한 뒤 결정한다. 공사비용은 원칙적으로 50만∼100만원으로 책정돼 있다. 그러나 꼼꼼히 현장답사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비용은 늘 초과된다. 하다 보면 손댈 게 자꾸 늘기 때문이다.
“오늘 집수리는 기본자재 준비만으로도 80만원 이상 지출됐어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교회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번 해주자고 했어요. 수리비 외에 책상 의자 컴퓨터 스탠드를 구입했어요. 복지관에서는 장롱을 지원했어요.”
대원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전문 목수 2명, 새시·보일러 기술자 각 1명, 봉사를 하기 위해 일부러 도배자격증까지 취득한 복지사 등. 기술이 없는 이들은 보조를 하거나 전문 기술자 어깨 너머로 배운다. 정씨는 장판 전문가한테 기술을 배워 이제는 자신의 담당으로 굳었다. “장판∼”하면 바로 달려가야 한다.
한나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여덟번 정도 참여했다. 처음에는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봉사활동 점수를 따려는 심산이었다.
“처음 봉사하러 간 곳에서 엄마와 하루 종일 엄청난 양의 빨래를 했어요. 그날따라 너무 오래 해 밤 10시가 넘어 끝났어요.”
그 후로는 가잔 말도 못 붙이게 했지만 아빠는 항상 같이 갈 것을 권했다. 정씨는 따라오든 안 오든 부모가 하는 걸 보면 언젠가는 대를 이어 봉사를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봉사를 다니며 조금씩 달라지는 딸의 모습에 정씨는 흐뭇하다고 귀띔했다.
“집수리를 나온 곳은 대부분 가난한 가정이죠. 한나씨가 봉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엄마 아빠 딸인 게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고 고백하게 된다는 말을 자주 해요.”
정씨는 한나씨 외에도 딸, 아들이 더 있다. 셋 모두 집수리 봉사에 데리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대원들에게도 아이들과 함께 나올 것을 권하고 있다. 당장 부모 눈에는 안 보이지만 아이 심성에 플러스 알파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봉사는 행복한 중독
정씨는 ‘양봉’을 하면서 두세번밖에 빠지지 않았다. 한 번은 남선교회 회장을 하며 소록도로 1박2일 봉사를 떠났기 때문에 빠졌다. 한두 번은 몸이 아주 안 좋아 빠졌다.
“몸이 힘들고 찌뿌드드하다가도 여기 나와 땀을 쫙 흘리고 가면 어디 비싼 보약 먹은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얻어요.”
그는 봉사활동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느끼며 살고 있어 행여라도 빠질 때면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일봉’ 대장 오세현(60·의사)씨와 그 대원들도 “이 일을 안 하면 못 살 정도로 좋다”고 말한다.
오씨는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반대의 경우보다 더 크다 보니 봉사가 행복한 중독인 것 같다”며 행복해했다.
정씨는 봉사대 일을 하늘나라 갈 때까지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부부는 아이들만 다 키우면 둘이 손잡고 평생 섬기면서 살자고 약속했다.
“지금의 저를 보고 친구들은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놀라요. 제가 많이 변했거든요.”
모태신앙인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군대 가기 전까지 방황을 많이 했다. 몸도 많이 안 좋았다. 당시 방위병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출퇴근할 형편이 안돼 사정해서 현역으로 갔다. 그러나 막상 훈련소에 가니 자신이 없었다. 훈련소에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 “건강하게만 해주시면 평생 교회 주일성수 꼭 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일성수를 했다. 성경 말씀을 보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지금 이렇게 변하게 됐다는 것. 이런 그였기에 봉사에 대한 사명감도 남달랐다.
봉사를 하면서 잘못된 정부 정책으로 인한 대책 없는 현장도 접했다. “자녀가 부모를 돌보지 않아도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돌봄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예요. 복지정책의 맹점이라고 봐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갔으면 합니다.”
그는 열을 가지고 하나를 만드는 일을 하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남으면 남는 대로 나누며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포천=글 최영경 기자·사진 최종학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