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지구를 굴리는 사람들

입력 2011-07-05 17:37


연극지도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그중 종이로 이름을 나타내는 시간이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상상력을 키우는 데 좋다고 한다. 종이를 찢고 구기고 접는 소리가 가득하더니 한 사람이 손을 만들어 보인다. 자기 이름에는 ‘서로 상(相)’이 있어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며, 손가락 하나보다 다섯 손가락으로 일을 하고 싶단다. 또 한 사람은 말갈기처럼 너풀거리는 종이 조각을 들었다. 이름이 여자 같아 불만이라고 했다. 묵직한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 종이를 두껍게 접은 사람도 있다.

코만치 인디언의 이름이 이색적이었던 소설이 생각난다. ‘곰 열두 마리’는 사려 깊은 촌장의 이름이고, ‘주먹으로 서다’는 인디언들에게 포로로 붙잡혀 온 소녀의 이름이다. 소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인디언을 주먹으로 혼을 내준 후 그런 이름이 붙었다. ‘늑대와 춤을’도 인디언이 백인 군인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백인 병사와 야생 늑대의 우정에 감복해 가장 남자다운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인디언들은 이름에 따르는 명예도 중요하게 여겨 그에 맞게 헌신하고 봉사적이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비 전시회에 갔더니 나비 이름이 그 생김새에 꼭 들어맞아 감탄을 했다. 제비꼬리처럼 날렵해서 ‘긴꼬리제비나비’, 노란 줄이 세 줄 있어 ‘황세줄나비’, 날개에 여덟팔이 거꾸로 그려져 ‘거꾸로여덟팔나비’,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유리창나비’였다. 날개 끝에 투명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짧은 일생을 사는 나비가 아름다운 건 비늘과 무늬 때문이 아니라 자연에 순명하듯, 이름을 거스르지 않고 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얼추 자식들이 꿈을 찾아 제 길을 가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다 보니 동창들이 연락을 해온다. 이름만 들어도 까까머리 촌뜨기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이름은 40년 전 그대로인데 머리숱이 줄고, 흰머리가 반을 넘는다. 어릴 적 오디 따먹느라 혓바닥이 검게 변하고, 소맷부리에 코를 훔치던 얘기를 하다 보니 처음에 봤던 그들의 흰머리나 주름은 순간 성형을 한 듯 보이지 않는다. 모임에 온 동창들을 헤아려 보니, 어느 정도 사회적 직위를 가진 친구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잠시 허전했다. 배꼽 친구의 추억으로 머물고 싶은데, 열세 살의 소년 소녀로 되돌리고 싶은데 명함의 직위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인생은 없으면서도 있는 몇 가지 환상에 의해 이어진다고 한다. 그중에 이름도 한 가지가 아닌가 한다. 어느 분야건 스타덤의 자리에 유명인을 올려놓기까지는 정상에 오르려는 숱한 무명인이 피라미드처럼 그 기둥을 받치고 있다. 생태계를 이루는 자연 또한 이름 있는 생물보다 이름 없는 생물이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지 않은가.

요즘 세상이 왜 이러냐고 한탄하는 소리가 높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전진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얼까. 화려한 명성과 영화의 뒤안길에서 명함은커녕 이름 석 자 내보이기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지렛대를 들어올리며, 지구를 굴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