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5) 술로 유명했던 정형외과에서 금주 선언

입력 2011-07-05 17:55


의사 세계는 도제제도와 같다. 스스로 배우는 학문이 없겠지만 특히 의학이란 윗사람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 선후배 관계가 군대 못지않게 엄격하다. 특히 한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다 보니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1992년 레지던트 생활을 앞두고 굉장히 고민스러웠던 것은 술 문제였다. 당시 정형외과는 술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곳이었다. 앞서 말했듯 대학 2학년 때 나는 이렇게 서원한 바 있다. ‘하나님, 의술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술은 일생동안 마시지 않겠습니다.’

군대 이등병과 같은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급기야 ‘전주 예수병원으로 가서 레지던트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모두 뜯어 말렸다. 레지던트를 한양대 병원에서 마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결심했다. 하늘 같은 학과장 교수님을 찾아가 담판을 짓기로 한 것이다. 술을 못 마신다고 그만두라면 정말 그만둘 심산이었다.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정형학과에 합격한 이창우라고 합니다.”

“그래, 축하한다.” 환갑을 넘긴 교수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이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정형외과에 건의할 말이라도 있는가.”

“앞으로 정형학과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과장님께 성실하게 잘 배워서 교실에 절대 누가 되지 않고 자랑스런 제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제가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장차 하나님의 선교사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을 절대 마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음주를 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장군 앞에선 이등병 신세였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당하게 선포해 버렸다.

“허허허. 알았으니 나가 보게.” 곧바로 집합이 걸렸다. 동기 6명이 일렬로 섰다. 수석 레지던트의 훈시가 있고 바로 밑의 3년차 레지던트들이 펄쩍 뛰었다. “이창우가 어떤 놈이야! 하늘 같은 과장님께 술을 안 먹겠다고 한 놈이 어떤 놈이냐구!” 이후 연차별로 줄줄이 집합이 걸렸다.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의자가 날아다니는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건방지게….”

그날로 나는 100일 당직에 걸렸다. 말 그대로 100일간 외부출입 없이 병원을 지키는 것이다. 잠을 1∼2시간밖에 못 잤다. 그것도 호출을 대비해 신발을 신고 있어야 했다. 병원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분명히 8층을 눌렀는데 깜박 잠들었다가 다시 1층에 서 있는 일이 반복되었다. 병원 기도실에서, 때로는 울퉁불퉁한 개인의자를 붙여서 잠깐 눈을 붙이기도 했다. 그래도 성경읽기와 기도는 빠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 험악하다는 입국식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 말이 입국식이지 조폭처럼 일렬로 서서 선배들이 따라주는 술을 한번에 들이키는 자리였다. “야 인마, 술을 먹는 척이라도 해!” “야, 쟤는 아예 술잔도 주지 마. 과장님도 술 먹이지 말라고 하셨던 독종이야.” 그날 이후 과장님과 교수님들은 신앙을 지키려는 나를 조금씩 인정해주기 시작했고, 정형외과 대리 운전기사 역할을 충실히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하나님과 약속했던 시간의 십일조, 서원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기다. 힘든 레지던트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양가 부모님의 도움이 컸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