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철환] 뒷모습이 아름다운 것들

입력 2011-07-04 17:37


“오래 이어지는 고전의 공통점은 사랑 받는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배가 고파도 밖에서 혼자 밥을 먹지 않는다. 밖에서 일을 보다가 끼니를 거르고 한참 뒤 배가 고프면 음식점으로 가지 않고 빵집으로 간다. 빵을 사가지고 나와 길을 걸으며 가급적 사람들 눈을 피해 조금씩 먹는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빵이 그 순간만은 내게 소중한 양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눈을 피해 빵을 먹는 일은 언제나 부자연스러웠다. 이러한 행동은 모종의 정신적 불구성일 텐데, 상처의 기원은 기억해낼 수 없는 지난날의 상처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과거의 상처는 과거의 이야기이면서 현재의 이야기이고 미래의 이야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빵 중에서 베이글이나 바게트를 좋아한다. 모든 사람들이 베이글이나 바게트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것들은 세계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빵의 고전이다. 이것들이 고전이 된 것은 아마도 맛의 담백함 때문일 것이다. 담백하다는 말은 여운이 있다는 말일 수도 있을 텐데, 고전이 된 것들은 대부분 자극적이거나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고 담백한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고전이 된 음악이 그러했고, 고전이 된 책이 그러했고, 고전이 된 영화가 그러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면 자극적인 것들은 더 자극적인 것들에 의해 무너지고, 화려한 것들은 더 화려한 것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것만을 좇는 사람들에겐 더 자극적이고 더 화려한 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빨리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가치를 인정받으며 묵묵히 세월을 견뎌낸 것들은 ‘고전’이 될 수 있었다.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사랑받았다는 것이다. 책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영화든, 음식이든, 그 무엇이든, ‘고전’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것들이 무엇 때문에 사랑 받고 있는지 우리들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며칠 전, 시내에 있는 공연장에서 뮤지컬을 봤다. 세계인들 사이에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대형뮤지컬이었다. 공연 첫날 배우들의 팬 사인회가 있었다. 유명배우들의 사인회는 관객이 많아 공연 전후로 계획되어 있었다. 공연 전에 있었던 사인회 풍경은 보기에 민망했다. 공연장 로비에 앉아 네 명의 배우들이 사인을 했는데, 세 명의 유명한 배우 쪽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울 수 없어 두 줄로 세워야 할 정도였다. 유명배우들과 함께 무명배우도 한 명 앉아 있었다. 무명인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두 명이 사인을 받고 나면 줄이 끊어지고 다시 한두 명이 사인을 받고 나면 줄이 끊어졌다. 무명배우는 웃고 있었지만 몹시 쓸쓸해 보였다.

뮤지컬 공연이 끝난 뒤에도 팬 사인회는 이어졌다. 오래 전의 영화 시사회 풍경처럼 어쩌면 공연 전과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명배우가 공연 중 많은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담백하고 담담하게 노래한 무명배우의 연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은근히 기대했던 완벽한 반전은 아니었지만 팬 사인회 풍경은 공연전과 많이 달랐다. 무명배우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선 관객의 수가 유명배우들 못지않게 많았다. 담담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관객을 대하는 무명배우의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아름다운 것들은 뒷모습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에도 사랑 받는 세상의 모든 고전들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것들이다. 사랑 받을 만한 조건은 별로 없지만 사랑 받을 만한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들이 고전이 됐으면 좋겠다. 그림이 밥이 될 수 없어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도 그림에 전부를 걸었던 반 고흐의 그림 같은 고전들을 만나고 싶다.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 해도, 보잘것없는 재능이라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아름다운 뒷모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에게 고전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아름다운 이 세상의 고전이 아니겠는가.

이철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