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4) 죽마고우의 죽음… 그의 몫까지 헌신 다짐
입력 2011-07-04 17:50
“영석이가 간밤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 인천시립병원으로 빨리 와줘야겠다.”
1981년 1월 어느 날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영석이 어머니의 축축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손이 덜덜 떨렸다. “예? 영석이가 죽었다고요! 아니,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영석이가 죽다니요. 어떻게 이런 일이….”
죽마고우로 평생 선교를 같이 하자고 다짐했던 영석이가 죽었다. 나는 그 당시 서울고를 졸업하고 재수 끝에 한양대 의대에 합격했다. 80년 서울대 의대를 목표로 했지만 그만 쓴맛을 봤다. 중·고등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는 서울의 모 대학 공대에 합격만 해놓고 종로학원에서 예비고사를 다시 준비했었다.
홍영석은 실력 있는 친구였다. 교회생활에 열심이었던 그는 내 앞에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대 사대에 한 번에 합격하고 주일학교 교사생활을 하던 영석이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낙담하던 나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주님 일 하겠다고, 평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던 영석이를 그렇게 데리고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정말 이렇게 하실 수 있는 겁니까.’ 병원을 향하며 나는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다. 그와 같이 했던 시절을 생각하니 눈물만 펑펑 쏟아져 나왔다.
“네가 영석이랑 친했으니,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주렴.” 영석이의 부모님은 내가 식구도 아니지만 염을 하도록 허락하셨다.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둔탁한 분위기의 영안실에 들어섰다. 시체냉동고에서 나온 싸늘한 영석이가 차디찬 금속침대에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얼굴을 보니 흙빛이었다.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영석이가 아니었다. 금세 의외의 안도감이 다가왔다. ‘영석이는 늘 밝고 환했다. 이건 내 친구 영석이가 아니다. 그는 이 땅에서 입고 있던 육신을 남겨놓고 분명 하나님께 가 있다.’ 확신이 들었다.
친구의 육체를 알코올로 닦고 수의를 입힌 뒤 정성스레 관에 넣었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 ‘영석아, 네가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가게 됐구나. 우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약속했잖아. 네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로 했던 만큼 나도 배로 열심히 주를 위해 섬길게.’ 입에선 찬양이 흘러 나왔다. “이 세상 작별한 성도들 하늘에 올라가 만날 때/ 인간의 괴롬이 끝나고 이별의 눈물이 없겠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새찬송가 606장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그때 영석이의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비신자들은 죽음 앞에 통곡을 하며 소리친다. 조문객들은 밤새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친다. 하지만 교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건한 장례식장에서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죽음 다음에 천국이 있는 기독교인의 삶이 엄청난 축복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스무 살 때 겪은 친구의 장례와 재수생활은 교만했던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81년 3월 한양대 의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 때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 하지만 견고한 다짐만큼 혹독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